오 헨리의 단편 중에 강도와 신경통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주인은 잠을 깼습니다. 그 순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총을 든 강도가 서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강도는 총을 들이대며 주인에게 손들어!”라고 외쳤습니다. 집 주인은 엉겁결에 두 손을 들려고 했지만 왼손밖에는 들 수 없었습니다. 오른 팔에는 심한 신경통이 있어서 마음대로 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본 강도는 다그치며 호령을 합니다. “왜 한 손만 드는 거지? 나머지 손도 들어!” 집주인은 자초지정을 설명합니다. “저는 신경통이 심해 오른 손이 거의 마비되었습니다. 아무리 들려고 해도 도저히 들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강도가 갑자기 얼굴 표정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는 주인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나도 신경통 때문에 다른 일은 할 수가 없어서 이 짓을 하고 있소. 낮에는 일도 하지 못하고 밤이면 온 몸이 쑤셔서 잠을 못 잔다오. 결국 먹고 살기 위해서는 강도짓밖에는 할 일이 없소


이렇게 시작된 강도와 주인의 대화는 서로 아픔을 털어 놓으면서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자기가 강도라는 사실도 잊어버린채 말입니다. 주인 역시 강도를 만난 두려움은 까마득히 잊은 채 신경통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털어 놓았습니다. 강도는 깨어난 주인을 죽일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주인은 재물도 빼앗기고 몸까지 상할 위기였습니다. 이 둘은 원수지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경통을 같이 겪고 있다는 동병상련이 이들의 마음을 녹여준 것입니다. 원수가 오히려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짤막한 이야기는 인간관계의 커다란 비밀 하나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누군가와 내가 동질성을 인식하는 순간 이미 마음 속으로는 친한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렇게 친하던 사람이 나와 생각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서먹해지기까지 합니다.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가장 큰 요소는 같은 경험입니다. 신경통이라는 같은 경험이 서로를 하나로 묶어 놓는 것입니다. 암으로 투병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위로는 암으로 현재 고통을 겪고 있거나 전에 암 투병을 했던 사람입니다. 사실 직접 암으로 투병을 해보지 않고는 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감정과 기분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암을 두 집 건너 하나라는 말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의료시설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처음부터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암으로 투병했다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공유가 됩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하는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픈 사람이 곁에 있다고 같이 아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 쟈슈아가3살 때 스토맥 플루에 걸쳐 며칠간 아주 아픈 적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냈습니다. 하루 하루가 달라지는데 보기가 너무 안스러웠습니다. 부모 마음에 대신 아파주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안스럽고 힘들어보여도 대신 아파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경험을 다 갖기는 어려워도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공감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아픔과 감정을 같이 느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제가 덴버로 온 지가 꼭 10년째가 되었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켈리포니아에서 교회를 개척해서10년 반을 섬기다가 우리 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켈리포니아 교회를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당회가 모였습니다. 저를 송별해 주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그때 사회를 보시던 장로님이 당회원들이 돌아가면서 목사님과의 좋은 추억이나 기억날 만한 것이 있으면 돌아가면서 나누자고 제의를 했습니다. 벌써 10년이 지난 이야기입니다. 그때 모였던 여섯 분의 장로님들이 모두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꼭 한 분의 이야기만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장로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몇 년 전 어느 당회자리였다고 합니다. 평일 날 저녁에 당회를 했는데 그 날따라 일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당회 시간을 맞추려고 정신없이 서둘렀는데도 일이 끝나지 않아 30분 늦게 당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저녁도 먹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점심도 가볍게 먹었기 때문에 배가 아주 고픈 상태였습니다. 이미 당회는 시작되었고 늦게 들어가는 것도 다른 당회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자 모두가 자기를 쳐다보는데 쥐구멍이라도 들어갈 상태였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장로님, 저녁 식사라도 하셨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합니다.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너무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10년간 제가 인도한 예배와 성경공부 거의 모두를 참석하면서 들은 말씀은 기억나는 것이 없는데 그때 그 이야기만은 또렷이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눈가가 젖어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공감을 느끼게 되면 마음이 열립니다. 서로에게 더욱 따뜻하게 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늦은 것만을 탓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잘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늦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모릅니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바빴는지를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부터 물어봐 주어야 합니다. 그때 공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대제사장집에 잡혀 가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을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하며 잡아뗐습니다. 주님이 죽으시는 곳이라면 그곳까지 따라가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입술이 아직 마르기도 전입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시던 닭이 두 번째 울었습니다. 그는 밖에 나가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자기도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주님을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는지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엎지러진 물입니다. 없던 일로 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 곁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주님이 아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님 앞에 설 수도 없습니다. 수제자라는 사실이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 앞에 서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베드로의 인생은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만나십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고 물으시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부인을 했느냐?”고 책망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말로 물으셔도 베드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자기가 한 짓이 너무 엄청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아주 기쁜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자기의 잘못이 가시가 되어 찌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질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까지 한 베드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즉각 대답합니다.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 제가 이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우리 같으면 다음 질문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아니 사랑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러고도 사랑한다는 말이 입에서 나와?” 그러면 또 할 말이 없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는 죄인처럼 주님 곁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베드로의 이름은 성경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해서 떠나갔다라는 바울의 표현처럼 또 다른 데마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마지막 질문도 똑 같았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주님을 부인했다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정말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왜 자기가 그런 끔찍한 일을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 짓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마음을 알기에 그런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공감입니다. 베드로는 그 이후 역사에 남을만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전생애를 바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공감의 힘입니다. 공감이 일어나면 마음이 열립니다. 죽도록 헌신합니다. 서로를 사랑합니다. 누구를 보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