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우리교회에 부임한 때가 2007 10월입니다. 정확하게 10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처음 교회에 부임하면서 새벽 예배 시간에 말씀을 전한 책이 바로 시편입니다. 시편은 무려 150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매일 새벽 하루에 한 편씩 시편을 성도들과 함께 묵상했습니다. 일주일간 5일간 새벽예배를 드리니까 7개월 정도 시편으로 말씀을 전한 것 같습니다. 주일 설교는 한 성경을 강해를 한다고 해도 일주일에 한 번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성경을 차례대로 강해를 하지만 대부분 전 주일에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새벽은 매일 예배를 드리니까 그만큼 더 친근감이 있고 기억도 잘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인 저도 매일 시편을 묵상하면서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시편을 볼 때마다 하루 하루가 새롭고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선물을 받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시편에 대한 설교가 끝난 다음에는 창세기로 갔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매일 새벽마다 기도에 참석한 성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약 2년 후에 다시 시편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미 한 번 다 다룬 말씀이지만 더욱 새롭게 감회가 깊었습니다. 시편을 묵상하고 말씀을 전하는 하루 하루가 또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시편을 지나 선지서와 신약을 다룬 후 다시 시편으로 오기까지는 무려 6년여 시간이 걸렸습니다. 새벽기도에 꾸준히 나오시는 분들은 6년 동안 성경66권 전체를 다 읽고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지난 해8월 시편을 세 번째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지난 3개월 반 동안 안식월을 가져서 시편이 중단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9월에 다시 묵상하기 시작한 시편은 이제 7편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번에 시편을 다시 묵상하면서도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루 하루 시편을 보고 묵상하고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전하는 저에게 그렇게 은혜가 되었으니 새벽에 함께 묵상하시는 분들도 같은 은혜가 임했을 것입니다.


집 사람은 새벽에 제가 전하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 적고 있습니다. 새벽은 제가 설교문을 작성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완성된 설교를 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새벽 예배가 마친 후 받아 적은 설교를 컴퓨터에 옮깁니다. 그런 후에는 새벽예배는 참석하지 못하지만 말씀이 갈급한 교우들에게 카톡이나 이메일로 매일 아침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 한국에 나갔을 때 우리 교회에 출석하다가 한국으로 귀국한 오세중 집사님 집을 심방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오 집사님도 새벽마다 설교문을 이메일로 보내 줄 수 있느냐고 부탁을 해왔습니다. 종종 큰 은혜를 받는다는 피드백이 옵니다. 어제는 오 집사님이 새벽 말씀을 묵상한 다음에는 아내 되시는 이승민 집사님에게 전달해 준다고 합니다. 이승민 집사님을 그 말씀에 다시 본인이 묵상한 것을 추가해서 군대에 가 있는 아들에게 매일 전달해 주고 있다고 하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시편이 묵상이 끝나가는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물론 다른 성경의 말씀들도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은혜도 넘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편은 하루 하루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뿐 아니라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줍니다. 지난 목요일 새벽에 묵상한 시편 141편도 저는 새벽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그 말씀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이 칼럼을 쓰고 있는 시간이 목요일이니까 바로 글을 쓰는 오늘 묵상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다윗의 말년에 큰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아들 압살놈이 자기 추종자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던 사건이 벌어집니다. 다윗이 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느끼는 비참함, 자괴감이라고 하는 것은 말도 다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백성들 보기도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압살놈이 아닌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뜻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세는 압살놈에게 아주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나라 안에 압살놈 만한 실력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하들과 백성들이 이미 그의 수하로 들어갔습니다. 평생 다윗과 함께 동거동락을 했던 친구들도 다윗에게 등을 보였습니다. 권력의 속성이 어떤 지를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다윗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왕궁을 빠져 나와 유대 광야로 피신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때의 분노와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지은 시가 바로 시편 141편입니다. 10절밖에 되지 않는 그 시편 속에는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재난, 해골, 스올 입구, 올무, 함정, 그물같은 단어들이 시편 전체에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만 해도 일어서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사방이 막혀 있는 절망적인 모습을 그런 단어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런 상황에서 드리는 다윗의 기도가 얼마나 정제되어 있고 영적인 섬세함이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141:3). 저는 다윗의 이 기도를 보면서 왜 성령이 우리 입술에 가장 먼저 임하시는 지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화가 나면 입술이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쌓이면 우리 입술은 원망과 불평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프면 신음소리가 납니다. 충격을 받으면 가장 먼저 소리를 지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이 절망의 순간에도 입술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입술에 성령을 부어달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배워야 할 기도인지 모릅니다. 평상시에는 그나마 입술을 단속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고 배신감에 치를 떨 때, 아무 이유 없이 비난과 공격을 받을 때 가장 먼저 우리 입이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런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내뱉는 믿음 없는 소리조차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도전이 되는 지 모릅니다. 오늘 하루 내 입술을 얼마나 통제했는 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그런 상황에서 드리는 다윗의 기도는 마음을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141:4).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나를 공격하고 비난해도 나는 같이 대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를 갖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누가 조금만 내 편을 들어주면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악인 줄 알면서도 내 편이 되어준다는 것 때문에 발을 들여 놓습니다. 다윗은 압살놈을 피해 도망을 치다가 시므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사울의 친척입니다. 다윗을 얼마나 비난하고 욕하는 지 모릅니다. 마치 다윗의 인생이 끝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이 단칼에 베어 버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들의 칼 잡은 손을 거두게 합니다. 내 몸에서 난 자식도 나를 해하려고 하는데 왕위를 빼앗긴 사울의 친척이야 오죽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끝까지 마음을 바르게 먹는 것입니다. 상황이 나쁘다고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시키지 않습니다. 옳은 것은 끝까지 옳은 것입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워도 그 진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구부러진 나뭇가지는 그 그림자도 구부러져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삐뚤어져 있으면 결국 그 사람의 말과 행동도 삐뚤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바른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마지막 다윗의 기도는 모든 것은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141:5). 압살놈이 아비에게 칼을 겨눈 것도, 신하들이 배반을 한 것도, 백성들이 등을 돌린 것도 다 은혜로 받아들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여러 사람이 죽습니다. 나라에서 가장 큰 사건은 반역죄입니다. 삼족을 멸합니다. 멸문지화가 당하게 됩니다. 다윗은 이 반란으로 죽인 사람이 없습니다. 압살놈의 죽음을 그저 슬퍼하고 애통해하기만 합니다. 나라가 나뉘어지지 않았습니다. 복수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은혜 앞에서 원수도 없고 미움도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러나 나만 정확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에게 내 문제의 해결이 모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편을 참 사랑합니다. 남은 두 주 동안만이라도 시편을 같이 묵상하고 시편의 기도가 내 기도가 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