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가 오늘 창립 49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미주에 있는 한인교회들 중에서는 오랜 연륜을 가진 교회 가운데 하나 일 것입니다. 1968년은 아직 한인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덴버에도 그 당시에는 2-3 백명 정도밖에는 한인들이 없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려 2만 명이 넘으니 사실 엄청난 세월의 무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창립 50주년 희년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미 한 해 전부터 희년 준비위원회를 구성해서 다양한 계획들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2년을 두고 준비하려고 했던 것을 하나님이 벌써 이루어 주신 것도 있습니다. 바로 교회 수양관입니다. 우리 교인들의 쉼과 안식, 재충전을 위해서 희년을 맞는 우리 교회에 수양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갖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의논도 제대로 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좋은 수양관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모든 조건이나 시설이 우리 교회에 너무 적합해서 희년을 기다리기도 전에 지난 5월 수양관을 구입했습니다. 지금까지 5개월이 지났지만 많은 부서들과 개인들이 수양관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보셨던 모든 교인들이 만족해 하며 감사하고 있어서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느끼는 지 모릅니다. 올해에는 주로 우리 교인들이나 부서에서 사용하지만 내년부터는 지역 사회를 위해서 수양관을 개방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지난 7월 덴버 지역 목회자 수련회를 위해서 수양관을 빌려준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한 번 가본 목회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참 쉼과 안식을 가졌었노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외부에 개방 일정을 알리기도 전이지만 교회의 수련회나 리더들 모임을 그곳에 갖고 싶어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가 50주년 희년을 맞이하면서 지역사회와 지역 교회를 위해서 필요한 역할을 해야겠다는 소망을 하나님이 수양관을 통해서 들어주신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던 것은 희년이라고 하는 절기입니다. 희년은 50년에 한 번씩 돌아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날을 평생에 한 번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 희년에는 두 가지 큰 사건이 이스라엘 전역에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모든 땅이 본래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무리 땅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희년이 되면 더 이상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희년이 가까워지면 땅값이 상대적으로 쌀 수밖에 없습니다. 몇 년 밖에는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규례는 모든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진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그 땅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가 영원토록 땅의 주인일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믿음의 원리였습니다. 내가 가진 생명마저도 내 것이 아닙니다. 본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 희년의 사건은 남의 집에 종이 되었던 사람이 자유를 얻는 날입니다. 노예는 사실 정해진 기간이 없습니다. 평생 주인집에 종살이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 모든 종들이 아무 조건 없이 풀려나는 날이 희년입니다. 이 날은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가 됩니다. 가는 곳곳마다 은혜가 흘러 넘칩니다. 자기 것을 움켜쥐는 날이 아닙니다. 가진 것을 내 놓는 날입니다. 미움이 사라집니다. 오랜 원수가 친구가 되는 날입니다. 긴장과 두려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싸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얼싸안고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이 날을 가리켜서 “주의 은혜의 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긴장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해주지 않습니다. 남이 안 되어야 내가 잘되기 때문입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어나지 못하도록 누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이기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곤한 것입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 없이는 긴장을 풀 수가 없습니다. 은혜 없이는 이웃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해줄 수가 없습니다. 은혜는 마음의 여유와 만족을 줍니다. 나만 바라보던 사람이 남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희년이 가져오는 축복입니다. 우리 교회도 희년을 바라보면서 교회를 통해 이런 놀라운 축복이 우리 교우들의 가정들 뿐만 아니라 덴버 지역에 널리 퍼져 나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5일간 창립 49주년 기념 특별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세우신 강사 목사님들을 통해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중에 목요일에 말씀을 전하신 오세오 목사님의 오병이어의 역사에 대한 말씀이 우리 교회의 희년 준비와 꼭 들어 맞는 것 같습니다. 오병이어는 4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제외하고는 4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탄생 기사도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기록하고 있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오병이어의 사건은 복음서에서 아주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병이어는 주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모습, 풍요로운 모습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비록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시작하지만 남자들만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는 나중은 심히 창대해지는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작게 시작합니다. 부족합니다. 가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놀라운 풍요가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계신 곳이 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배고픔도 슬픔도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민 생활은 하루 하루를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곳입니다. 만족보다는 늘 채워야만 하는 갈급함을 갖고 살아갑니다. 잔디는 늘 물이 있는 쪽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곳을 늘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다고 모든 필요가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늘 목마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은 항상 치유가 있습니다. 배부름이 있습니다. 안정과 평화가 있습니다. 여유와 낭만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현장은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약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하루종일 굶었습니다. 가난했던 사람들입니다. 가까운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심지어 유대와 이방 나라에서까지 먼길을 걸어온 사람들입니다. 그 전날이라고 그들이 제대로 끼니를 때웠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날도 한 조각의 빵 하나도 먹지 못한 채 들에서 밤을 보낼 수 밖에 없던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비록 주님을 통해 말씀의 은혜는 받았지만 고픈 배를 부여잡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비참함이 서려 있을 그날 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오병이어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그 떡과 생선을 먹으면서 얼마나 기쁘고 좋았을까요?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부요해졌습니다. 그러기에 그 떡을 다 먹고 난 다음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다면 부족함이 없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놀라운 역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군중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합시다. 집에 가서 밥을 먹게 합시다.” “이 사람들을 마을로 가게 해서 밥을 사먹게 합시다.” “이 군중들을 다 먹이려면 2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합니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방법입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군중들이 돌아갈 집이 없습니다. 인근 마을에 이들을 모두 먹일만한 식당이 없습니다. 제자들이나 군중들에게는 떡을 살만한 돈도 없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때 안드레가 어린 소년이 가져온 도시락을 주님께 내밀었습니다. 그것이 오병이어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받으시고 놀라운 기적의 역사, 축복의 역사를 만드신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진 것을 주님께 내밀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보리떡 하나, 물고기 한 마리가 되면 됩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이제 은퇴했으니 저는 쉬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섬기던 일을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울에게는 심각한 질환이 있었습니다. 세번씩이나 간절하게 고쳐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병을 낫게 해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네 몸이 좋지 않으니 쉬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끝까지 주님이 주신 사명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아프니까, 힘이 드니까 더 은혜만을 사모하면서 갔던 것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설탕도 들어가지 않은 밋밋한 보리 떡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런 떡이라도 주님 손에 들려지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펴서 주님께 내밀 때 오병이어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 교회를 통해 나타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