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그곳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선교사님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다시 국내선을 타고 첫번째 기착지로 가야 하는 우리들은 공항에서 무려 5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현지 선교사 사모님들이 집에서 직접 만들어 온 김밥은 오랜 여행의 모든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선교사님들과 터키 선교의 인내와 보람을 나눈 후 우리는 카이세르 행 터키 국내선을 타고 3시간 정도 더 여행을 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가려는 곳은 ‘갑바도기아’였다. 갑바도기아는 소아시아 반도 중앙고원에 위치해 있는 지역으로 교회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경에 나타난 갑바도기아에 대한 기록은 단 두 곳밖에 없다. 사도행전에서는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을 때 성령에 충만한 사도들이 방언으로 말을 하는데 각국에서 온 사람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예루살렘에 모여든 15나라의 사람들 가운데 갑바도기아라는 나라가 나온다(2:9). 또 한 곳은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쓰면서 그 편지를 받을 수신자로 ‘갑바도기아에 흩어진 나그네’라는 표현을 한다. 베드로가 사역을 하고 있던 당시에 갑바도기아에 이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인 것이다. 성경에는 비록 단 두 곳외에는 다른 기록이 더 이상 나오지 않지만 갑바도기아는 박해를 당하고 있던 초대교회 교인들의 험난한 고통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갑바도기아의 신비스런 지형

갑바도기아는 터키의 브라이스 캐넌으로 알려진 최고의 관광명소이다. 평상시에는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 발디딜틈이 없다. 하지만 터키 공항 테러 직후였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거의 없는 가운데 갑바도기아 지역을 세밀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또 하나의 은총이었다. 갑바도기아는 오래전 이 지역의 가장 높은 에르지에스산의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과 화산재가 1,200미터가 덮은 곳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비, 바람의 침식작용, 그리고 겨울에는 얼고, 여름에는 녹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달 표면과 비슷한 아주 기묘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기이한 경관으로 SF영화의 선구자격인 ‘스타워즈’ 1편의 촬영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스타워즈를 감독한 루카스는 갑바도기아를 가리켜 “지구의 자연이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지역”이라고 했다. 스타워즈가 대 흥행을 거두면서 갑바도기아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더 유명하게 된 곳이다. 갑바도기아 사람들은 신이 빚은 듯한 이 조각물들을 ‘요정의 굴뚝’이라고 부른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고깔모자와 버섯같은 기기묘묘한 기암괴석들이 즐비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화산재가 굳어서 만들어진 응회암은 사람들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굴을 팔 수 있을 만큼 부드럽다. 날카로운 돌만으로도 절벽을 뚫어 집을 지을 수 있다. 그러기에 지금도 집들이 마치 고대 아파트처럼 층층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갑바도기아의 기독교 역사

갑바도기아에 최초로 정착했던 사람들은 앗시리아 상인들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BC 19세기 경 교역을 위해 이곳에 식민지 도시를 건설했다. 그 후 BC 16세기에서 11세기까지는 히타이트 민족이 노예와 광산물을 사고 파는 무역도시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히타이트의 멸망과 함께 갑바도기아는 쇠퇴하면서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AD 1세기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는 이 지역을 수중에 넣고 페르시아와의 국경선을 정하게 되었다. AD 2세기 경부터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국경도시일뿐만 아니라 숨어서 살기에 적합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탄압을 피해 4세기까지 많은 기독교인들이 들어와 살게 된 초대교회 역사의 현장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4세기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기독교인들은 이곳에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숨어서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신앙생활이 자유로워지자 타락하기 시작했다. 순수한 신앙을 찾는 사람들이 다시 이곳에 모여들었다. 바로 수도원 운동의 산실이 된 것이다. 세상을 떠난 동굴에 기거하면서 순수한 신앙의 전통을 지키려고 한 것이다. 그 후 7세기 후반에 이슬람교도들이 터키 중부를 침공하면서 수중에 넣어 버리자 기독교인들이 다시 그들의 핍박을 피해 모여들었던 곳이 바로 갑바도기아 지역인 것이다. 그 당시 기독교인 인구에 무려 6만에 이르렀다고 기록도 남아 있다. 이렇게 몰려든 기독교인들이 안전하게 머물기 위해 바위산을 뚫어 지하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초대교회 이후 천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의 숨결이 묻어 있는 곳이 바로 갑바도기아 인 것이다.


괴레메 계곡

야외 박물관이 있는 ‘괴레메’(Gereme) 계곡은 갑바도기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에는 기암괴석이 노란색, 분홍색, 초록색을 띠면서 형형색깔을 이루고 있다. 또한 그 모양이 수도승의 모습, 어떤 것은 피라미드 모습, 어떤 바위는 가족 등 다양한 형샹을 하고 있다. 괴레메 계곡은 오래전부터 사람이 집으로 굴을 파서 사용했다. 지금도 천연의 바위 동굴을 중심으로 많은 호텔이 세워져서 영업을 하고 있다. 그곳에 하룻밤을 묵는다면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괴뢰메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Traveller’s Cave Hotel은 갑바도기아의 화산암을 깍아 만든 것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괴레메 계곡은 마치 전체가 버섯과 같이 생긴 바위들도 이루어져 있으며 수많은 동굴 교회들이 지금도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동굴 속에는 박해 속에서 신앙을 끝까지 간직했던 그리스도인들과 수도자들이 성경의 이야기들을 무려 천년에 걸쳐 그려 놓았던 프레스코(Fresco) 벽화들을 즐비하게 감상할 수 있다. 많은 부분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파괴되기도 했지만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동굴 교회도 많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애의 기적들, 최후만찬, 유다의 배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을 주제로 많은 그림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성지순례객들에게 큰 축복 중의 하나이다.


우치사르 계곡

우치사르는 갑바도기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옛날 이곳에 살던 수도사들이 비둘기를 길렀다고 하여 ‘비둘기 골짜기’라고도 부른다. 동굴 주거지의 곳곳에는 비둘기들이 드나들던 구멍들이 나 있다. 지금도 실제로 많은 비둘기들이 이곳에서 서식하고 있다. ‘뾰족한 바위’라는 뜻을 지닌 우치사르는 커다란 바위에 비둘기집처럼 생긴 굴을 뚫어서 마치 외계에서나 볼 법한 모양으로 되어 있다. 우뚝솟은 바위는 내부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있으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괴레메 계곡의 풍경은 절경 그 자체이다. 사실 비둘기들은 이곳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귀한 선물이었다. 성화를 그리기 위한 재료인 알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비둘기 알에서 염료를 얻어 동굴예배당의 성화를 채색하였다. 또한 비둘기를 길들여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로 활용하였다. 동굴 지역과 외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어야했다. 군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말살하기 위해 쳐들어올 때 비둘기를 이용해서 연락을 함으로써 미리 재난에 대비할 수 있었다. 비둘기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우치사르 계곡은 노아에게 홍수 후에 물이 말랐음을 알리는 메신저 비둘기를 연상케 한다.


지하도시의 고난의 삶, 데린쿠유

성지순례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연코 갑바도기아 최고의 장소는 바로 지하도시인 데린쿠유이다. 초대교회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종교박해가 극에 달했던 로마의 데시우스 황제 시절 일곱 명의 젊은이들이 동굴로 들어갔다. 그들은 잠에 들어 187년간이나 꼼짝 않고 누워있었다. 서기 445, 마침내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을 때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이 빵을 사려고 내민 동전은 이미 통화가치를 잃어버린 것이어서 무용지물이었다. 그렇게 왕성하던 로마는 전염병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더 이상 누구도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는 일은 없었다. 이 일화는 동굴에 묻혔다가 살아난 예수와 함께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증거로 자주 인용하는 이야기이다. 당시 사람들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 187년이나 살아왔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동굴 속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 그곳에서 죽었던 박해받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당시 동굴은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주거의 기능을 모두 갖춘 하나의 도시였던 것이다. 기독교는 고난을 통해 성장해왔다. 십자가가 있어야만 부활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