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인 사도 바울의 고향인 다소를 찾아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과 감격일 것입니다. 다소에 있는 역사적 유물의 가치가 있고 없고를 떠나 바울이 태어나 자라난 곳, 그 거리에 서 보는 것 자체가 마음에 큰 설렘을 줄 것이다. 현재에도 터키 최고의 관광명소인 갑바도기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것에 위치한 다소는 지금은 관광객들이 그리 찾지 않는 드러나지 않는 장소이다. 특이한 풍경이나 관광명소가 발달되지 않은 곳이기에 평범한 주민들이 일상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중소 도시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행적을 찾으려는 성지순례객들에게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명소임에 틀림없다.
다소의 지리적 위치와 도시 역사
다소는 현재 타르수스(Tarsus)라고 불리는 도시로서 이스탄불에서 남동쪽으로 약 600마일 지점에 있는 지중해 해변에 위치하고 있다. 성경에는 다소가 길리기아 관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행9:11, 30, 11:25, 21:39, 22:3). 지금의 시리아나 이스라엘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다. 바울이 나중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를 했던 것을 보면 이스라엘과는 거리적으로 가까운 위치 때문에 유대인들이 이주해 살던 지역임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다소는 고대 사회에서는 항구 도시였지만 지금은 지중해에서 10마일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는 6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세계의 고도였다. 주전 3000년 경에는 이미 요새화되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러므로 다소는 고대 역사적 사건들의 중심지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BC 1200년경 그리스인들의 침략을 받아 파괴가 되기도 했고, BC 858년부터 34년간 앗수르의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로 앗수르 황제 살만에셀의 공적비인 블랙 오벨리스크가 다소에 세워지기도 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다소를 공격했을 때는 알렉산더가 그 도시를 구해주기도 했다. 그 이후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이 통치하면서 헬라의 도시로 발전시켜 나갔다. BC 2세기 안티오쿠스 4세 시절에는 다소를 헬라의 자치 도시로 만들었고 유대인들을 이주시켜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하고 경제적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 로마 통치 시절에는 다소는 그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 때문에 길리기아 지방의 정치적 수도가 되어 소아시아의 학문과 문화 그리고 군사적 중심지가 되었다.
다소 출신의 철학자들과 바울의 출생
다소는 많은 철학자들과 문헌 학자들을 배출한 고장으로 유명하다. 이곳 출신의 철학자들 중 유명한 사람들은 스토아 학파의 안티파터(Antipater), 라키데머스(Rachidemus), 네스터(Nester), 아데노도러스 (Adenodorus), 그리고 말커스 카토(Marcus Cato) 등이 있다. 특히 스토아 철학인 발달한 도시로서 역사학자 스트라본이 의하면 당시 다소의 문화적 수준은 아테네와 살렉산드리아에 견줄만큼 학문과 문화의 도시로 널리 알려졌다고 전한다. 바울이 고향에 대한 자부심으로 자신을 호송하던 로마의 천부장을 향하여 자신의 고향을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행21:39)이라고 자랑한 것을 보더라도 바울이 살던 시대에 다소가 누린 정치, 경제, 학문의 발전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다소는 현재 인구 8만밖에 되지 않는 소도시이지만 바울이 태어나던 당시에는 50만명으로 자랑하는 대도시로서 지중해 어느 도시도 다소보다 크지 않았다. 그러기에 다소 출신의 학자들은 세계의 수도인 로마에 가서 가르치는 일이 아주 많았다. 바울은 이런 다소의 높은 문화속에서 태어났고, 그에 걸맞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던 사회적 여건도 이런 배경 속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유대인들 역시 뛰어난 재능과 교육에 대한 열심으로 로마 시민권을 수월하게 받았고 사회적인 위치도 공교했다. 이런 바탕에서 바울은 어려서부터 헬라의 최고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또한 유대인이라는 자부심과 정체성때문에 유대 최대의 학자인 가마리엘에게 사사를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던 것이다. 그때 사회적 지도 위치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과 교류도 하게 되었다.
다소의 특수 산업과 바울의 직업
다소는 지중해의 번성한 상업도시이자 각국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항구도시였다. 천연 요새인 다소항은 키두누스 강이 지중해로 흐르고 도시 북쪽에는 타우러스 산을 포함하여 수려한 산맥으로 둘러쌓여있다. 그러므로 풍부한 광물 자원과 수려한 목재들이 강과 항구를 통해 전세계로 팔려나갔다. 다소의 특수 산업으로는 직물과 천막 제조업이 발달되어 있었다. 직물의 원료는 길리기아산 아마였으며, 천막 제조 재료는 킬리시움이라고 불리는 염소털의 직물이었다. 바울의 아버지는 천막 제조업을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바울 역시 아버지의 천막 만드는 기술을 배워두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번성하던 다소의 천막제조업은 바울이 세 차례의 선교여행을 하면서도 천막을 만드는 기술을 통해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클레오파트라 문
다소 도시를 들어서면서 도로 가에 돌로 만든 작은 문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곳을 방문하는 거의 모든 관광버스들이 그 도로를 통과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문이다. 원래는 바울의 문이라 불리워졌으나 이슬람이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부터 클레오파트라의 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BC 41년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지중해를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의 안토니우스 장군을 만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미 로마의 지배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유혹해서 자신의 야망을 채워려고 했지만 그가 암살을 당하자 그 대안으로 안토니우스 장군을 택하게 된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 역시 카이사르 사후 옥타비아누스와 벌이는 로마의 주도권 다툼에서 이집트의 자금과 보급품의 지원이 절실이 필요했다. 결국 두 사람의 필요에 따라 서로 연합할 뿐만 아니라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계기가 바로 다소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다소에서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만남은 이후 예술작품의 엄청난 영감을 주었고 수많은 작품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세계 역사의 큰 물줄기를 만들어냈던 이 두 사람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다소 한 가운데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문인 것이다. 바울도 어린 시절 이 문을 통해 드나들던 한 시대를 풍미하던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세계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그를 사용하여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것이다.
다소의 기독교 유적
성지순례객들에게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사실 수려한 경관도 아니며, 세계 역사의 현장도 아니다. 과연 어떤 기독교 유적이 그곳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소에 성경에 나와 있는 특별한 유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을 13권이나 썼으며, 기독교에 지대한 유산을 남겨놓은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는 것은 대단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다소에 현재 남아 있는 바울의 발자취는 그가 출생하여 성장하며 살았다는 바울의 생가가 있고, 그 뜰에는 바울이 늘 물을 길으거나 마셨을 ‘바울의 우물’이 있다. 우물의 깊이는 38m로 상당히 깊은 편이다. 우물 주위에는 바울의 생가의 터가 평지보다 내려 앉은 상태로 발굴된 주춧돌들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생가터는 유리로 차단막을 세워 그 유적지의 훼손을 막고 있다. 또한 다소 성읍의 한 가운데에는 사도 바울 기념교회가 서 있다. 교회당 내부는 봉쇄된 아치와 4개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교회당 실내의 둥근 천장의 중심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다소, 또한 동시에 다메섹에서의 회심 후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바울이 다시 돌아와 머물렀던 다소에 비록 많은 유적지가 남아있지 않더라도 바울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큰 감동이며 은혜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