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에 부르던 ‘어머님 은혜’가 생각이 많이 나는 한 주간이었습니다. 5월 8일은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지키는 어머니 날입니다. 어머니 날, 아버지 날이 따로 있는 미국과 다르게 어머니 날만 있었던 한국은 오래 전 어머니 날을 어버이 날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미국에서는 5월 둘째 주일인 오늘이 전국적으로 지키는 어머니의 날(Mother’s Day)입니다. 우리가 늘 부르던 ‘어머니 은혜’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2절을 또 이렇습니다. “어려선 안고 업고 얼러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하리요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구절 구절 단어마다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가 묻어나지 않는 것이 없는 노래 가사입니다.

옛사람들이 어머니의 은혜를 여덟 가지로 정리한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임신 후 아기를 태중에 잘 보호해준 은혜입니다. 아이를 갖는 순간부터 어머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급해도 뛰지 않습니다. 몸을 천천히 움직입니다. 몸이 아파도 약도 먹지 않습니다. 흔한 감기약조차도 거부합니다. 태중에 있는 아이에게 혹시라도 약이 해를 끼칠까봐서입니다. 나쁜 것은 보지도 않고 생각도 안합니다. TV에서 폭력적인 장면이 나오면 아예 눈을 감아버립니다. 태중에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주기 싫어서입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기울이는 정성이 보통이 아닙니다. 태아가 들으라고 좋은 음악을 듣습니다. 매일 저녁 성경말씀을 한 시간씩 읽어주는 엄마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직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과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런 사랑을 이 세상에서 누가 해주겠습니까?

두 번째 어머니의 은혜는 산고를 겪으며 아기를 낳아준 은혜입니다. 실제로 출산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의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출산의 고통은 뼈가 부러질 때 느끼는 고통의 2배가 넘는다” 뼈에 금이 간 사람이나 골절이 된 사람은 이루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낍니다. 치아에 금이 간 사람 역시 그 통증을 얼마나 호소하는 지 모릅니다. 얼마 전 후배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대화를 하는 내내 얼마나 치아의 통증을 호소하는 지 옆에서 보는 저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진통제를 몇 알씩 먹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치과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가서 진찰을 한 결과 이에 금이 갔던 것입니다. 과거의 어머니들은 대부분 집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방을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벗어 놓는 섬돌이 있습니다. 그 섬돌에 신을 벗어 놓고는 물끄럼이 바라봅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저 신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아이를 낳는 것은 생과 사의 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은혜 세 번째는 자식을 낳고 나면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아이를 낳으면서도 낳은 후에는 아기를 안고서 기쁨을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는 그런 어머니의 사랑의 이슬을 먹고 자란 것입니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더 이상은 아이를 안 낳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를 보고는 모든 고통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아이라면 다시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이 금방 든다고 합니다. 그만큼 엄마에게 아기는 생애의 가장 큰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아가야, 나의 어예쁜 아가야’라는 시가 있습니다. “눈물방울 서젓 그렁그렁 맺힌 아가야, 너의 두 눈은 세상에서 비길 데 없이 해맑은 하늘 호수란다. 그 호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의 마음은 한없이 깨끗해지고. 이슬 맞은 앵두 같은 아가야, 너의 고운 입술은 이 세상 그 무엇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연분홍빛 보석이란다. 그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한마디 한마디에 나의 귀는 즐겁기가 한이 없고….” 아기를 보고 한없이 행복해하는 엄마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는 시입니다. 엄마에게 아기같은 선물은 없습니다.

네 번째 어머니의 은혜는 입에 쓴 것은 자신이 먹고 단 것만 자식에게 먹이는 은혜입니다. 스무디가 시중에 처음 나왔을 때의 일입니다. 한 손자 녀석이 “할머니 맛있어 먹어”하고는 할머니에게 스무디를 내밀었습니다. 할머니는 “나는 그런 것 싫다. 너나 많이 먹어라”고 했습니다. 그 후로 손자는 할머니가 스무디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만 맛있게 먹었습니다. 얼마 후 할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손자는 울먹거리며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가장 먹은 싶은 것이 무어야?” 그때 할머니는 “네가 먹던 스무디다”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어려운 시절 우리의 어머니들은 굴비의 몸은 좋아하시지 않고 대가리만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 사과를 드셔도 사과 속 꼬투리만 드셨습니다. 우리는 정말 어머니가 꼬투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고 자랐습니다. 자녀들이 좋은 것 먹는 것을 보시는 것보다 더 배부른 것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른 자리에는 자식을 눕히고 젖은 자리에는 자신이 눕는 것이 어머니의 다섯 번째 은혜입니다. 아버님이 40대 중반 늦게 신학교를 가셨습니다. 그리고 50 가까이 되셔서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개척하시기 전 아버님은 오산리 금식기도원에 40일 금식기도를 하러 가셨습니다. 저는 그 때 대학생이었지만 동생들은 고등학생, 중학생이었습니다. 어머님은 저희들 밥을 해주셔야 하기 때문에 금식기도원에 가시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집에서 20일을 금식기도하셨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금식기도를 하는 것만도 힘이 드는데 자녀들 밥을 해주시면써 금식기도를 하고 계셨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밥을 하시면서 그 냄새를 맡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하지만 아무 내색 없이 자녀들 밥은 꼬박 챙겨주셨습니다. 나는 힘들어도 자녀들은 편안하게 해주시려는 어머님의 마음을 그때처럼 새삼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자식이 먼 길 떠나면 내내 걱정해 주는 것이 어머니의 여섯 번째 은혜입니다. 불가에는 ‘살아있는 부처’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홀어머니와 살던 한 젊은이가 어느 날 ‘살아있는 부처’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던 스님은 “저고리를 뒤집어 입고 신발을 거꾸로 신은 이를 만나면 그가 바로 살아있는 주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젊은이는 ‘부처’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 깊은 산중의 절들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 이런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부처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 있다” 그래서 젊은이는 장터와 거리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러나 허사였습니다. 3년을 헤맨 젊은이는 지질 대로 지쳐 집으로 돌아가 문간에서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집 나간 아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 기다리다 잠자리에 든 어머니가 아들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놀라 벌떡 일어나시더니 뒤집어 벗어놓은 저고를 그대로 걸쳤습니다. 섬돌 위에 놓인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문간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살아있는 부처는 집 안에 있었습니다.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의 은혜 일곱 번째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나쁜 일도 마다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는 한 이방 여인이 주님을 찾아와서 간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어린 딸때문입니다. 한참 꿈많은 소녀로 자라나야 할 아이가 흉악한 귀신이 들렸던 것입니다. 아무 때나 소리를 지릅니다. 학교에도 가지 못합니다. 그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천갈래로 찢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주님에게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냉정하게 그 어머니를 물리치십니다. 심지어 개라는 표현까지 쓰시면서 그 딸을 고쳐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엄마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비록 개취급을 당하고 창피와 모멸을 겪더라도 딸을 위해서라면 개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엄마의 이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그 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부끄러움도 아픔도 다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은혜는 자식을 끝까지 염려하고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영화 ‘말아톤’으로 유명해진 배형진이라는 자폐아를 둔 어머니에게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머니의 제일 큰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때 어머니 박미경씨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나의 가장 큰 소원은 내 아이가 나보다 하루 먼저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들보다 더 오래 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을 끝까지 돌보겠다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어머니가 아니고는 자폐아인 아들을 돌볼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나이가 들어서도 자식입니다. 죽을 때까지 돌보고 사랑하려는 마음이 어머니에게 항상 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우리는 오늘까지 살아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