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이라는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유태인이었기에 세계 2차 대전 때 독일군의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도 부모도 같이 끌려갔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온갖 고문과 모욕을 당했습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언제 가스실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의 부모가 먼저 가스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아내도 끌려갔습니다. 얼마나 큰 공포요 두려움이었는지 모릅니다. 자기만이 아닙니다. 그 수용소에 갇힌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다 못해 미치광이가 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가 쓴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프랭클은 이 경험을 토대로 어떤 사람들이 이런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는가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세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 번째 창조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살아남더라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살아남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수용소를 빠져나가 나찌의 만행을 알리는 책을 쓰겠다” 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살아남았습니다. 프랭클 역시 이 수용소에서 배운 교훈을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모습을 계속 그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적 가치를 지닌 사람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경험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 절박한 수용소 안에서도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를 쓰기도 합니다. 글을 쓸 수 있는 종이만 보이면 그 위에다 일기를 씁니다. 십 여년 전 아프카니스탄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사람 중에 바지에 깨알처럼 그날 그날의 일들을 적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억류기간에 있었던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경험적 가치를 지닌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절망의 그림자가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태도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오래 견디는 것입니다. 죽음이 다가 온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려움이 올수록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내가 아프면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더 오래 살 것 같지만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죽음의 순간까지도 남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더 건강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인생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요? 수용소 안에서 시를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한 조각의 빵이라도 더 차지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나서는 것은 오히려 간수의 눈에 띌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숨어있는 것이 최선일지 모릅니다. 나서는 것은 오히려 바보 같은 행동입니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뜻이 없이 사는 것은 더 불안한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절망을 이겨낼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뜻을 갖고 사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절망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는 넘쳐 나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상황은 어려워도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에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그 목적을 이루려는 뜻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뜻을 정한 사람에게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뜻을 정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니엘이 살던 당시의 세계는 바벨론에 의해서 평정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의 모든 나라들이 바벨론의 수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유다 역시 세 차례의 침공을 받고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의 1차 침공 때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아주 노련한 정치가였습니다. 세계를 통치하는 것은 단순한 군사적 억압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던 왕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식민지 국가의 젊은 인재들을 활용했습니다. 유능한 청년들을 선발해서 바벨론 교육을 시켰습니다. 3년 동안 언어와 선진 문화를 가르쳤습니다. 수학, 과학, 역사, 정치, 지리에 이르기까지 엘리트 교육을 시켰습니다. 바벨론 최고의 학자들로 하여금 이들을 가르치는데 온 힘을 기울이게 했습니다. 그들을 단순히 힘으로 누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자기가 먹는 음식을 식민지 청년들에게 3년 동안이나 먹게 했으니 졸도를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정도면 왕이 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물불을 안 가리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의 길입니다. 이대로만 하면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뜻을 정했습니다. 왕이 먹는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떨지는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성공의 길이 막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왕의 명령을 어긴 죄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의 양심을 저버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목적은 바벨론에서의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보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왕을 기쁘게 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다니엘과 친구들의 인생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제의를 거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뜻을 정한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지키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자기들의 결심을 환관장에게 알렸습니다. 그는 크게 낙담을 했습니다. 다니엘이 고기를 먹지 않아서 몸이 부실해 지면 그 책임이 자기에게 돌아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때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우리를 열흘 동안만 시험해 보십시오. 우리는 채식만 하겠습니다. 열흘 후에 고기를 먹은 사람과 우리를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 사람들보다 좋아 보이지 않으면 처분대로 따르겠습니다.” 여기 중요한 말이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말을 믿으라는 것보다 더 확신에 찬 모습입니다. 절대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결과를 보고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환관장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담대함과 확신은 세 가지 내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비밀에 대한 테스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알아도 떳떳한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동기가 깨끗하고 순수합니까? 우리의 마음을 누가 들여다 보아도 자신이 있습니까? 인생의 담대함과 확신은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공유의 테스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도 권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처럼 하면 당신도 달라질 수 있어!” 이런 자세를 가진 사람은 확신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 기도의 테스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지금은 비록 캄캄한 터널 속에 있는 것 같아도 반드시 끝은 온다고 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일을 비밀스럽게 추친하지 않았습니다. 환관장에게 알렸습니다. 마음의 동기를 그대로 내보였습니다. 신앙양심에 대한 문제는 결코 그들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도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올 것입니다. 그때 이 난관을 믿음으로 극복한 모델이 필요합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들은 기꺼이 믿음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내 자녀가 내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해도 될만한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키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뜻을 정한 믿음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뜻을 정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 기대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드디어 시험기간인 열흘이 지났습니다. 채식만 먹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얼굴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좋아 보였습니다. 환관장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고기를 주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 구들은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난 이상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1등을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1등 보다 더 큰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왕에 눈에 띄는 것이 소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왜 공부하는 지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하는 그들에게 은혜를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지혜와 명철을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당대 학자들보다 10배의 지식을 갖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공부해서 나오는 결과가 아닙니다. 열심히 한다고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바벨론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처음부터 그런 야심을 가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다니엘의 목표는 결코 총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총리 자리를 맡기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기대 이상으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