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는 여장을 풀기도 전에 심각한 문제 앞에 부딛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교회에 오게 되었다. 이들은 율법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예수를 받아들였고 초대교회의 중요한 멤버였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만을 가지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다.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교인들을 가르쳤다. 사실 유대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부하기 어려운 논리였다. 더구나 이 가르침은 사람들의 마음에 참 편안하게 다가왔다.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바울이 너무 앞서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급기야 폭력까지도 행사했다. 바울이 다니는 곳곳마다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많았다. 바울의 영향을 막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견차이 때문에 곳곳에서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분쟁을 그냥 두었다가는 초대교회 안에 큰 분열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최초의 교회 공의회를 소집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사도행전 15장에 나타나는 교회 역사상 유명한 1차 공의회이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이 예루살렘 공의회에 파송하게 된다. 그러나 너무나 큰 축복 가운데 공의회는 은혜스럽게 끝나게 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훼손하지 않은 채 행실 부분에서만 서로 주의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결론을 맺게 되었다. 안디옥으로 돌아온 바울이 곧바로 2차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된다. 1차 때 복음을 전했던 더베와 루스드라 그리고 이고니온 지역을 다시 들러 형제들을 위로하고 권면한다. 터키 서북쪽인 무시아 지방으로 올라가서 드로아에 당도하게 되는데 이곳이 복음 역사의 새로운 분기점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드로아의 지정학적 위치
드로아의 정식명칭은 ‘알렉산드리아 드로아’이며 터키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해안도시이다. 드로아 항구는 마게도냐와 그리스를 잇는 에게해의 중요한 항구도시들 중 하나이다. 드로아에서 마게도냐까지는 약 100마일 떨어져 있다. 바울 당시 드로아는 에베소보다도 인구가 많았던 가장 번창했던 대 항구도시였다. 특히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항구로 발전하면서 서양과 동양의 문물이 어느 도시 보다도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도 그 당시의 신전, 극장, 목욕탕, 특히 트라야누스 황제가 만든 도수교라는 다리 등 유물이 발견되어 그 옛날의 번영을 말해 주고 있다. 특히 바위 산을 깍아 만든 석굴 무덤은 마치 요새 안에 있는 호텔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현재의 지명은 ‘달얀’(Dalyan)으로서 강과 바다가 만나는 천혜의 자연 환경과 고대 유적이 살아 숨쉬는 여행지로 유럽 전역에서 각광받고 있는 곳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줄지어 찾아온다.

트로이 목마
사도행전에는 ‘드로아’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을 한다. 우리 말 발음으로는 바울과 연관된 기록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드로아’는 역사적으로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에 나오는 ‘트로이’와 같은 지명이라면 더 많은 관심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트로이 목마’가 처음 등장하는 책은 BC 8세기 사람인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라는 작품이다. 그리스가 트로이를 무너뜨릴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트로이의 목마’였다. 그리스는 트로이를 둘러싸고 10여 년간 대격전을 벌렸지만 성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스는 은밀하게 한 가지 작전을 펼치게 된다. 트로이에게 패하는 척 하면서 주둔지에서 퇴각하는 것이다. 트로이 성 앞에 커다란 목마를 만들었는데 그것만큼은 가져갈 수가 없는 것처럼 꾸몄다. 그 목마 안에는 30여명의 정예군 군사를 매복시켜 놓았다. 트로이 군대는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면서 그 목마를 성 안으로 끌고 갔다. 전쟁에서 이긴 상징으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날 한껏 취해서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사이에 목마 안에서 그리스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급기야 성문을 열고 성밖에 대기하고 있던 그리스 군사들을 끌어들이게 된다. 그로 인해 긴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막을 내릴 수 있었다. 트로이 목마의 사건이 있었던 그 역사적 현장이 바로 드로아인 것이다. 지금도 드로아 지역에는 그때의 역사적 사건을 체험하게 하기 위한 거대한 목마가 있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드로아가 그 옛날 트로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본다면 생생한 역사적 장면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과 세계역사는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만드시 자연과 역사 속에서 생생한 믿음의 증거도 같이 볼 수 있는 것이다.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
BC 1250년에 있었던 트로이 전쟁은 지중해 무역의 패권이 동양 국가에서 서양 국가로 넘어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주목할 사건이 그로부터 약 1300년 후인 AD 51년경 일어나게 된다. 사도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중 이 드로아(트로이)에 오게 된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밤에 환상을 보게 된다.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에게 자기 나라인 마게도냐(그리스)로 건너와서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바울이 즉시로 이것이 성령이 선교지를 마게도냐로 바꾸라고 지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때 가지 못했던 소아시아(터키)의 북부지역을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통해서 선교지를 그리스, 유럽 지역으로 바꾸게 된다. 그는 환상을 본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마게도냐 지경인 빌립보로 향하게 된다. 복음은 곧 유럽의 중심지인 로마로 갈 날도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역사의 연구’를 쓴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때 드로아에서 바울을 태우고 간 마게도냐로 가고 있었던 배가 바고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배였다고 말하고 있다. 유럽의 문명사의 미래를 안고 가는 배가 바울이 탄 배였다는 것이다. 유럽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유럽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유럽과 서구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이 있었기에 지금 미국도 존재하는 것이다. 미국에 유럽의 청교도들이 건너와서 민주 국가, 기독교 국가를 세운 것이다. 조선이 빗장을 열자 유럽과 미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와 지금의 한국 교회를 만들었다. 지금도 드로아의 바닷가에 서면 그 때 바울이 보았던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이 떠오른다. 

죽은 유두고를 살린 드로아 교회
제3차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 교회에서 3년 간 사역을 했던 바울이 그들과 작별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가게된다. 그런데 그의 여정에 약간의 변동이 생기게 된다. 원래 계획은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울을 해하려는 유대인들의 공모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게도냐를 거쳐서 소아시아를 통해 돌아가는 길을 택하게 된다. 바울이 뜻하지 않는 일정 변경 때문에 큰 유익을 얻은 사람들이 바로 드로아 교회의 교인들이었다. 2차 선교여행 때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드로아 교회는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었다. 늘 바울이 다시 한 번 방문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던 차에 바울이 그 지역을 지나게 된 것이다.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소아시아(터키)로 들어올 때 반드시 항구도시인 이 드로아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드로아 교회는 바울을 초빙해서 주일 밤 부흥집회를 갖게 된 것이다. 바울의 말씀 집회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깊은 밤중까지 계속 이어졌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바울과의 그날의 만남에서 성도들은 단 한마디라도 더 말씀을 듣겠다는 열의가 뜨거웠기 때문이다. 드로아의 회중 가운데는 유두고라는 청년도 있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그가 왜 3층 창턱에 걸터 앉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너무 피곤해서일 수도 있다. 그래도 말씀을 더 듣겠다는 생각으로 졸음을 이겨보려고 통풍이 잘되는 창턱에 앉았을 가능성이 많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 유두고라는 청년은 창가에 앉아 졸다가 그만 창밖으로 떨어져 죽게 되었다. 드로아 교회로서는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예배는 당장 중단이 되었다. 모든 드로아 교인들이 얼마나 당황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사태가 발생했을 때 바울이 즉시 “떠들지 말라”고 말한 것을 보면 교인들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난리가 났던 것이다. 바울은 즉시 죽은 그 청년에게로 가서 그를 살리게 된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교회와 함께 계심을 그 누구나 똑똑히 볼 수 있는 엄청난 체험이었다. 이 보다 더 큰 은혜는 없었을 것이다. 그 집회는 날이 새기까지 이어졌다. 드로아 교인들에게 그 날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