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친구의 우정을 나타내는 말로 ‘관포지교’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관중’과 ‘포숙’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장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벌어들인 돈을 항상 관중이 더 많은 몫을 챙겨갔습니다. 사람들이 관중을 지탄할 때마다 포숙은 관중을 감싸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관중의 형편이 가난하기 때문에 좀 더 많이 가져가도록 한 것이요.” 후에 벼슬 길에 올랐을 때 관중은 많은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무능하다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하지만 포숙은 관중이 아직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 주었습니다. 관중과 포숙이 함께 전쟁터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관중은 죽는 것이 두려워 세 번이나 도망을 쳤습니다. 사람들은 관중이 비겁하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포숙은 또 다시 관중의 편을 들었습니다. 늙으신 홀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두둔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관중은 정치적으로 왕의 반대편에 가담하면서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도 포숙은 왕을 찾아가 간곡한 설득을 합니다. “관중은 훌륭한 인재입니다. 저보다도 뛰어난 사람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단순히 나라를 다스리고 싶다면 저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천하를 얻으시려면 반드시 관중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분명 포숙은 재상의 자리에 오를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친구인 관중을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재상의 자리까지 양보를 합니다. 결국 그의 말대로 관중은 제환공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게 됩니다.

  포숙과 같은 자신을 인정해 주는 친구가 없었다면 관중은 결코 천하를 통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관중은 나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언제 들어도 아름다운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웹스터 사전에서는 친구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도 늘 같은 편에 서주는 사람”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욕해도 같이 욕하지 않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좋을 때나 힘들 때나 늘 같은 자리에서 서서 응원해주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진정한 친구 세 명만 있다면 인간은 결코 불행하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달라졌습니다. 항상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친구 한 명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평가를 합니다. 그만큼 외롭고 각박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동양에서 진정한 친구를 뜻하는 말이 ‘관포지교’라면 서양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입니다. 다윗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두 가지 정신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또 하나가 바로 요나단과의 우정입니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요나단만 생각하면 힘이 났습니다. 요나단이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식음을 전폐하면서 슬퍼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애가 지어 불렀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하1:26). 우리교회가 다음 주면 창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짧지 않은 장구한 세월입니다. 처음부터 다니셨던 분은그 젊었던 청춘이 이제는 하얀 백발로 변해있을 것입니다. 그 긴 세월 동안 한 교회를 섬기고 인생을 나누어오면서 진정한 친구가 있는 지를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친구가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부터라도 좋은 동반자, 친구를 만들기 위해 마음을 굳게 먹는 희년의 축복이 되었으면 합니다. 진정한 친구의 우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 가지 원리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왕궁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아주 낯선 곳입니다. 한 번도 왕궁 생활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왕궁에서 요나단은 다윗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요나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습니다. 다윗은 그런 요나단을 존경했고 자기의 롤 모델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에게 친구를 하자고 말을 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자기와는 너무나 차이가 나는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한 나라의 왕자입니다. 다윗은 여전히 일개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는 신분입니다. 더구나 나이도 요나단이 다윗보다 7-8살은 많았습니다. 요나단은 건장한 청년이었고 다윗은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먼저 손을 내민 것입니다. 마음이 맞으면 나이도 신분도 뛰어넘는 것입니다. 마음이 통하면 누구라도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요나단과 다윗이 마음이 통한 것을 두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용기입니다. 불레셋이 3만 승의 병거와 마명 6천을 이끌고 침략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3천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용기를 내는 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나단입니다. 그는 부하 한 사람만 데리고 적진으로 습격해 들어갑니다. 결국 그 죽음을 무릅쓴 용기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됩니다. 이와 똑 같은 일이 골리앗과의 전쟁에서도 벌어졌습니다. 이때는 요나단이 아니라 다윗입니다. 모두가 골리앗 앞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당당하게 싸우러 간 사람이 단 한 사람 있었습니다. 다윗입니다. 용기만 같았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철저한 믿음도 같았습니다. 부하와 함께 단 둘이서 수만의 적진으로 습격해 갈 때 요나단은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윗 역시 골리앗 앞에 칼과 창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갔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믿음은 조금의 차이도 없습니다. 이래서 마음이 통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끝까지 같은 편이 된다는 신뢰가 있어야 진정한 친구가 됩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언약을 맺었습니다. 자기 생명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그 자리에 끝까지 있어주는 사람입니다. 친구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란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하지만 진정한 친구는 마치 한 가족처럼 언제나 곁에 머물러 준다.” 세상은 가짜 친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모여들고 힘이 있으면 매일 찾아옵니다. 하지만 힘없고 병들면 그 곁을 떠나고 맙니다. 그렇게 친했던 사람들이 한 마디 불편한 말을 들었다고 관계를 끊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 친구는 다릅니다. 그가 잘 낫든 못 낫든 상관없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오랜 세월을 같이 하다 보면 왜 실수가 없겠습니까? 친구가 없는 자리에서 말을 잘못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친구의 본심은 아닙니다. 그 단계를 건너 뛰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친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볼테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정의 첫 번째 법칙은 그것을 가꿔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법칙은 첫 번째 법칙이 잘되지 않았을 때 관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의 실수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면 진정한 친구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친구가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끝까지 그의 편이 되어주어야 친구로 평생 남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낌없이 자기 것을 줄 수 있어야 진정한 친구가 됩니다. 친구 관계에서 문제가 될 때는 주지는 않고 받으려고만 할 때입니다. ‘이기적이다’ 라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관계를 더 이상 지속시키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관계는 계속해도 더 깊이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친구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감동적인 순간이 하나 있습니다. 생각을 뛰어넘는 선물을 받을 때입니다. 우리는 서로 예상하는 수준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선물을 받고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생각보다 큰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그 마음이 뭉클하게 전달이 되어 옵니다. 요나단은 자기가 입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왕자로서의 권위와 품위를 지닌 옷입니다. 자기의 군복인 갑옷도 주었습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칼도 활도 주었습니다. 요나단이 가진 칼은 이스라엘에서 단 두 개 밖에 없는 명검입니다. 사울과 요나단만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최고의 것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것을 기꺼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입니다. 요나단이 죽은 후 다윗은 숨어 지내던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데리고 옵니다. 왕자와 똑같이 대우를 해줍니다. 사울이 소유했던 모든 땅까지도 므비보셋에게 그대로 넘겨줍니다. 요나단에게서 받은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는 므비보셋만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명처럼 사랑합니다. 적들에게는 끝없이 관대했습니다. 받은 사랑이 크면 주는 사랑도 크기 마련입니다. 요나단이라는 친구 하나가 다윗을 이렇게 큰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힘들고 피곤한 인생 길에 진정한 믿음의 친구를 만들기로 결심하는 희년의 축복이 모든 가정 위에 넘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