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에서의 바울의 마지막 사역은 간수와 간수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받게 하는 것이었다. 바울을 감옥에 집어 넣고 매로 때렸던 관원들은 바울이 로마 사람이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죄를 지은 것이 확정되지도 않은 로마 사람을 학대한 죄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담당 관원들은 큰 문책을 받게 될 것이다. 관원들은 속이 타들어갔다. 결국 바울에게 사정을 해서 빌립보를 빨리 떠나달라고 간청을 하게 된다. 바울은 곧 루디아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는 빌립보 교인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아쉬운 작별의 정을 나눈 후 빌립보를 떠나게 된다. 이제 세워진지 얼만 안 되는 교회, 어린 샌생아 같은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바울에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엄마가 젖먹이 아이를 두고 떠나야만 하는 심정이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하지만 바울이 가는 길은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곳이기에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바울의 다음 목적지는 빌립보에서 약 100마일 정도 떨어진 데살로니가였다. 하지만 가는 길에 만나게 된 도시가 두 군데 있었다. 바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였다. 사도행전에는 이 두 지역에서 바울이 특별히 어떤 사역을 한 것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다. 행17:1은 이렇게 바울의 행적을 소개한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데살로니가에 이르기 전에 방문했던 두 지역의 이름만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하지만 바울이 스쳐 지나간 자국들은 그 지역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암비볼리
빌립보에서 남서쪽으로 40마일 떨어진 스트림몬강 유역에 있는 도시이다. 에게해 해안으로부터는 3마일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물이 풍부하고 자연 경관이 수려한 지역이다. ‘암비볼리’라는 이름 자체가 ‘강에 둘러싸인 도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현재 지명은 암피폴리(Amfipoli)이며, 네오코리로 알려진 트라키아의 한 성읍이다. 또한 암비볼리는 빌립보, 암비볼리, 데살로니가를 연결하는 로마의 중요한 고속도로인 에그나티아 선상에 있는 전략적 교통 요충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에그나티아를 그대로 따라가면 로마가 나오도록 되어 있다. 로마는 제국 안에 있는 거의 모든 도시에 포장도로를 건설했다. 도시에 그 도로를 따라 길을 나서면 결국 로마에 도착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암비볼리에는 5개의 전망대들이 있는데 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전망대는 북서쪽에 위치한 씨타워이며, 지금은 두 전망대만 남아있다. 북쪽 성벽은 207미터의 길이와 7미터의 높이로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암비볼리는 비옥한 땅이 많아 포도, 무화과 등의 열매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판기우스 광산에서 채굴한 금은을 수출했고 제조업이 발달되어 있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필립 2세와 알렉산더 대제 때 그리고 로마시대에도 암비볼리는 아주 번창하던 도시였다. 1세기에는 마게도냐의 첫 행정 수도의 역할을 할 정도였다. 바로 그 시기가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이 암비볼리를 방문하던 때였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공회당과 마차 경주장까지 갖추고 있었던 큰 도시였으나 2천 년 동안 역사의 부침 속에서 지금은 수백 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 되고 말았다.

사자상
그리스는 BC 4-5세기 당시 세계로 그 지배력을 높이려고 했던 페르시아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는다. BC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의 침공을 받았는데 그때 페르시아의 군대가 암비볼리에 있는 스트림몬강을 건너게 된다. 다리가 없던 그곳에 페르시아는 다리까지 놓으면서 강을 건너 그리스 본토로 진격해 들어가게 된다. 그리스 중남부에 있는 테르모필레까지 진격해 들어간 페르시아 군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하면서 철군하게 된다. 그 이후에도 페르시아는 계속해서 그리스를 침공해 들어왔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등장하면서 페르시아는 그 기세가 꺽이고 만다. 전에는 이 암비볼리가 적군의 수중에 가장 먼저 들어간 지역이었지만 알렉산더 군은 이 암비볼리 강을 지나 페르시아로 진격해 들어가 그들을 점령하는 역사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 승리를 기념해서 암비볼리의 스트림몬강 가에 세운 석상이 바로 사자상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료이자 사령관이었던 트라이어롸크를 기념해서 만든 것이다. 암비볼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놓여 있는 이 사자상은 그 옛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지역이 얼마나 많은 부침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바울도 암비볼리로 들어가면서 이 사자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그 외에도 암비볼리에는 비잔틴 시대 땡의 회당 구조와 비슷한 교회터가 두 군데가 있지만 바울이 복음을 전한 후에 세워진 것이 아니기에 성지순례객들의 주목을 받고 있지는 않다.

아볼로니아
암비볼리에서 30마일 남쪽으로 가면 아볼로니아라는 도시가 나온다. 여기서 남쪽으로 해안가를 따라 40마일을 더 내려가면 바울이 목적지로 삼았던 데살로니가에 들어가게 된다. 이 아볼로니아는 할키디안스에 의하여 BC 432년 볼비호수 남쪽에 세워진 고대도시이다. 이 지역은 로마시대, 비잔틴 시대, 오스만 터키 시대에 군사적 요충지로 각광을 받았다. 지금도 이 도시에는 그 시대의 화려한 영광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궁전, 원형극장, 장터, 운동장, 시의회 및 공중 목욕탕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암비볼리보다도 더 작은 마을로 약 500명 내외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아볼로니아에 대한 유적이 너무 부실하다는 것이다. 바울이 방문하던 당시에 그렇게 발전되어 있던 도시라면 얼마든지 바울의 복음 증거로 인해 변화가 일어났을 유적들을 발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들은 방문객들에 대해 아주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시대에 많은 철학자들과 이야기 꾼들은 다른 도시의 이야기들을 전달해 주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가 발달한 이유도 바로 그런 것이다. 방문객들이 전해 주는 이야기들은 주민들에게 가장 재미있는 여가 생활이었다. 더구나 헬라 철학에 정통한 바울이 그곳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 당시의 유적들의 흔적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바울과 연관된 유적들도 생겨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적은 인구가 살고는 있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는 주민들에게 깊게 배여있다.

바울의 설교 강단
아볼로니아에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바울의 유적은 바울이 아볼로니아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설교 강단이다. 마을 중앙에 가장 오래된 고목 아래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서면 아래에 많은 청중들이 모여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강단이 된다. 이곳에서 바울은 아볼로니아 사람들을 향해서 복음을 증거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바위 한 쪽 편에 대리석으로 안내판을 만들었다. 그 안내판에는 헬라어와 영어로 사도행전 17:1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성지순례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된다. 또한 목회자들은 그곳에 올라가 성경을 들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연상하면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 비록 복음을 전할 목적지도 아니었으며, 단 며칠이라도 머물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단 한 차례라도 바울은 아볼로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 복음을 듣고 얼마나 예수를 믿었고 그 후에 믿음의 역사를 만들어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의 불타는 사명감이 가슴속에 스며오는 것만 같은 장소이다. 비록 적은 수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아볼로니아 이지만 바울에 대한 사랑은 뜨겁다.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마을 입구에 아담한 바울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다. 물론 바울이 지난 간 후 세워진 교회는 아니다.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서 교회를 세운 것이다. 성경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아볼로니아라는 마을 이름에 대한 자부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빌립보 교회나 데살로니가 교회 같은 초대 교회의 역사가 묻어있는 교회는 아닐지라도 아볼로니아에도 그 당시 적은 규모로나마 교회가 세워졌을 것이다. 바울 기념 교회는 그런 추상을 가능케 하고 있다. 우리가 지나가는 곳에도 삶의 자국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덴버 그리고 섬기고 있는 교회에 어떤 형태로든 삶의 지나간 자국들은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바울처럼 예수를 위해 걸어갔던 자국들이 남겨지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