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생 믿음 생활을 합니다. 누구도 믿음이 좋아지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믿음 좋은 장로님, 권사님을 찾습니다. 우리가 따라갈 좋은 모델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교회 구석 구석에 믿음이 좋은 교우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일이 은혜스럽게 처리되어집니다. 목장에도 믿음 좋은 목원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목장을 인도해 가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워낙 믿음에 대한 말씀들이 많습니다. 믿음이 좋았던 사람들 역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불림을 받은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는 칭호가 결코 무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정의를 세 가지로 내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믿음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뢰’라는 말이 신약에서는 ‘믿음’이라는 단어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만 152회나 기록되어졌습니다. ‘의뢰’라는 단어는 “피하다, 기대다, 머무르다”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신발 끈을 묶을 때도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결국은 신발과 신발을 신는 사람이 끈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테니스를 종종 칩니다. 순간적으로 아주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운동입니다. 운동을 하기 전에 신발끈부터 단단히 묶습니다. 그래야 날아오는 공을 빠르게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끈을 단단히 묶으면 저와 신발은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제가 가고 싶은데로 신발은 그대로 따라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를 끈으로 묶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같이 가게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할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딘지를 모른다면 움직일 수 없는 것 입니다. 우리라면 얼마든지 물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라는 것입니까? 가면 아주 갑니까? 아니면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Trust me” “나를 믿으라”는 것 뿐입니다. 앞으로 갈 곳을 지시할테니 일단 출발부터 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았던 고향을 떠났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었습니다. 돈벌이가 얼마나 잘되던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만 두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하나님은 그의 인생을 책임지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장래에 주실 땅을 믿고 출발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물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시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유를 알려는 것은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해도 이유를 모르면 잘 하지 않습니다. 납득이 안 되면 나서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출발하지 않습니다. 갈 길을 모르면 중간에라도 다시 돌아오고 맙니다. 그렇다면 이유를 알고 하면 모든 것이 잘될까요? 납득이 되서 한 일이 얼마나 성공할까요? 얼마 전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폭팔적 인기를 끌었던 다단계 금융회사가 전격 폐쇄되었습니다. ‘지크 리워드’라고 불리는 회사가 고수익을 미끼로 수많은 투자자들을 모았습니다. 그 피해자가 무려 100만명에 가까웠습니다. 신규 투자자들의 돈으로 앞선 투자자들에게 고율의 배당을 해주는 전형적 폰지사기였습니다.지난  2008년 메이도프 폰지 사기로 엄청난 교훈을 받은 지가 몇 년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정기 예금 금리보다 훨씬 높은 10%-20%의 수익을 보장해 주겠다, 새로운 투자자를 끌어오는 사람에게는 하루 최고 1.5%의 투자수익을 주겠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폰지 사기의 피해자들은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메이도프의 피해자들은 최고수준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약속에 현혹된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이성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항상 이성에 따라서만 판단하고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 앞에서 수익이 오고 가는 것을 보면 이성과 지성은 일시적으로 작동을 멈추게 됩니다. 의심의 구름이 걷힙니다. 그 자리에 확신이 들어갑니다. 거기다 다른 사람들까지 그리로 달려가고 있다면 나도 무조건 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 최고 명문대 경제학 교수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본 결과입니다. 최고 경제 엘리트들이 이럴 정도라면 일반인들은 오죽할까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구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세상에서 잘살게 해주겠다는 유혹을 따라가시겠습니까? 돈을 믿겠습니까? 아무리 계산을 잘해도 세상에서 성공할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를 결코 낙오시킨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비록 갈바를 알지 못하고 갔지만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아버지로 만드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국부가 되었습니다. 그를 통해 수많은 믿음의 후손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를 하나님은 결코 실망시키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두 번째 믿음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기뻐하는대로 자기의 인생이 결정이 됩니다. 음악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음악가가 됩니다. 남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권력을 기뻐하면 정치가가 될 것입니다. 물건을 만들어 팔아 이윤을 내는 사업을 기뻐하면 그는 기업가가 될 것입니다. 공부를 좋아하고 가르치기를 좋아하면 교수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 얼마나 바빠졌는지 모릅니다.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정복한 나라들만 해도 수십개에 달했습니다.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해야만 했습니다. 여전히 사울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야만 했습니다. 말년에는 자식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형제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한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아들에게 좇겨 나라를 잃을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끊임없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다윗이 놓치지 않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그가 쓴 시편이 73편 정도가 됩니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는 4천편의 시를 쓴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시편들은 그가 예배에 갈 때마다 써서 가지고 간 것입니다. 시는 오래 생각하고 고민해야 나오는 문학형태입니다. 길이가 짧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문장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상황을 정확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것이 시입니다. 다윗은 이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밤새 뒤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늘 머리 곁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가 만난 상황을 살피면서 쓴 것이 시편입니다. 교회에서 무엇을 하나 해도 마음을 다해 넘치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책임이기 때문에 하는 것과 정성을 다해 기꺼운 마음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 달라도 다른 법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곧 우리 믿음의 정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우리 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단어는 우리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짊어지고 가야할 무거운 인생의 짐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느냐, 무엇을 마시느냐, 무엇을 입느냐는 항상 우리의 걱정거리들입니다. 먹는 것은 모든 가정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먹지 않고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먹는 자체를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얼마나 쌓아놓고 먹느냐는 것입니다. 곧 부를 쌓는 것을 걱정을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합니다. 현재 있는 것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재물이 그냥 굴러 들어옵니까? 일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때로는 정직하지 못한 일도 그냥 지나쳐야 합니다. 이것 자체가 믿는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인 것입니다. 마시는 것은 향락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쾌락의 욕구가 있습니다.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표준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가정을 지켜야 하는데 지키지 못합니다. 자기 몸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데 쾌락의 노예가 되게 만들어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온갖 염려와 걱정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입는 것은 과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입을 것이 없어서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 때문에 염려를 합니다. 이 모든 짐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신이 아닙니다. 믿음의 반대는 염려입니다. 염려는 내 짐을 맡기지 못하고 혼자 지고 갈 때 생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