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교회 절기에서는 고난 주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고난주일이라는 것은 오늘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전 한 주간의 첫 날이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첫 날인 오늘 많은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예수님을 환영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당시는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이었습니다. 보통 때는 약 10만 정도인 예루살렘 인구가 유월절에는 100만 이상으로 증가를 합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국에 나가 살던 사람까지도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키려는 것이 평생소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 기드론 시내쯤에 들어섰을 때 엄청난 무리들이 주님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을 겉옷을 벗어서 주님이 지나가시는 땅에 깔았습니다. 나뭇가지를 꺽어서 역시 바닥에 놓았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오늘도 예루살렘에서는 이것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을 것입니다. 해마다 종려주일이면 예루살렘 근처인 벳바게라는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곳에서부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을 부르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아주 큰 행사를 치르고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계획하는 여행사에서도 이 기간만큼은 가급적 여행 계획을 잡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여행을 하기도 어렵고 호텔을 잡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왕을 환영하는 예식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간 왕이 큰 승리를 거두고 성으로 들어올 때 모든 백성들이 길거리에 나가 감격에 찬 환영을 합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향해 부른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도 바로 메시야요 왕의 명칭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그대로 예수님은 메시야요 왕이셨습니다. 3년간 주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 역시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자리다툼을 한 것이 바로 며칠 전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종려주일에 있었던 백성들의 환영을 보고 제자들이 얼마나 흥분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19:38). 제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이제 왕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역시 예수님을 따르기를 잘했어! 이제 드디어 인생의 영화를 보게 되었어!” 아마 제자들은 저마다 이런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그 동안의 고생과 수고가 씻은 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영광만이 그들의 앞길에 놓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 우편에,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은밀하게 청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다. 내가 마시려고 하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주님이 말씀하시는 잔은 왕궁에서 마시는 진기한 포도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당연히 그런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감격스럽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잔은 바로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왕이십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 구원주이십니다. 주님은 왕이시되 섬김 받는 자리에 앉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섬기는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왕이신 주님은 왕좌에서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리저리 끌려 다니셨습니다. 왕이 영광을 받고 존경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한 가운데 서 계셨습니다. 왕은 이런 고난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더구나 주님은 한 나라의 왕정도가 아닙니다. 만 왕의 왕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이 고난을 자청해서 받으십니다. 주님의 고난에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왕이신 주님의 고난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크신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평상시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으셨습니다. 늘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너희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실 이때까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경건치 못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는 친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늘 그분 앞에 죄인으로 서야만 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지금 신약의 예배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제사는 동물의 피를 통해서 지나간 죄들을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누구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제물을 가지고 와야만 했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소나 양을 가지고 왔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제물로 자기고 왔습니다. 그들은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제물의 머리 위에 안수를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은 모든 죄를 동물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동물에게 쏟아 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이 있었습니다. 그런 순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지 6시간이 지난 오후 3시, 주님이 운명하시기 직전입니다. 5시간 이상을 아무 말씀 없이 고통스러워하시던 주님은 고통이 가장 심할 때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하나님에 의해 철저하게 버림을 받는 표현입니다. 구약에서는 동물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에게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죄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죄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의 죄도 포함되어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아담 이후 범죄한 모든 사람들의 죄도 심판하는 자리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모든 인류의 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 절규는 단순한 육신적인 고통의 절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심판을 주님이 혼자 받으시는 절규였습니다.


  두 번째 왕이신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처절한 고난의 자리에 예수님의 편은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주님을 변호하고 나서는 증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왕으로 삼겠다고 떠들어 댔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생명을 걸고라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못난 지도자들에게도 생명을 걸고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데 주님은 혼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6시간 동안 달려있는 동안에 7번의 짧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사람은 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 점점 죽어 가는 것입니다. 찔린 못에 온몸의 무게가 실리는 동안 그 고통과 아픔이 심장으로 몰리게 되어있습니다. 심장에 몰린 고통은 몸의 피를 자연스럽게 순환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근육의 마비가 오게 되고 온몸이 뒤틀리게 됩니다.


  호흡도 거의 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하신 7번의 말씀은 아주 짧은 외마디의 말씀들입니다. 말하기조차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주 말씀하실 수도, 길게 말씀하실 수도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하신 말씀을 모아보면 고작 2-3분이면 하실 수 있는 말씀들입니다. 한마디를 하시고는 오랜 시간 고통을 받으셔야 했으며, 겨우 또 한마디를 하고는 숨을 몰아 쉬셔야 했습니다. 이 철저한 외로움과 죽음의 고통 가운데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였습니다. 이 첫 번째 말씀은 십자가에 못이 박혀 높이 들려 올려진 다음 십자가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지금까지 3년 동안 줄기차게 예수님을 고발해 왔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지도자들의 사주에 의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앞장서서 외쳤던 군중들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침을 뱉고, 채찍질을 하고 못을 박았던 로마의 군사들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모두 조소와 조롱의 눈길로 예수님이 어떻게 죽느냐를 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그들을 위한 중보기도였습니다. 주님은 그 못된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비난에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이 십자가에서 베푸신 용서와 사랑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용서와 사랑으로 오늘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십시오. 그 고난을 통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먼저 받으십시오. 그래야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품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