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를 떠나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오게 되었다. 바울이 미리 계획한 목적지가 바로 데살로니가였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는 빌립보에서 약 100마일 남쪽으로 내려 가야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교통 수단이 마땅하지 않았던 당시에 100마일은 하루 이틀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도시 중간에 위치해 있었던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차례로 방문하게 된 것이다. 성경에는 이 두 도시에 대한 아주 짧은 기록만 있기 때문에 길어도 3-4일 정도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체계적인 전도 계획도 없었으며 누군가를 만나 제자를 삼는 일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스쳐가는 것만으로도 그 두 지역에는 지난 2천 년의 역사에 큰 복음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겨져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목적지로 택한 이유는 당시 마게도냐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가 데살로니가였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던 바울에게 비교적 회당이 있었던 데살로니가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는 큰 도시 답게 유대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데살로니가의 역사
데살로니가는 아테네 북쪽으로 약 300마일, 빌립보에서는 남서쪽으로 약 100마일 지점에 위치한 전략상 요충지이다. 지금도 그리스에서는 아테네 다음가는 제2의 도시로 100만 정도의 인구를 가진 활기찬 도시이다. 데르마익만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로서 에게해의 시원한 바람이 도시 구석 구석까지 미치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곳이다. 바다 반대편으로 멀리 올림포스산과 아토스산도 보인다. 이 도시는 본래 온천 때문에 데르마(뜨거움)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 데살로니가는 알렉산더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알렉산더는 약관 33세의 나이에 전장에서 죽고 만다. 그의 부하 장군 중에 카산드로스가 마게도냐와 그리스 전역을 통치하는 왕이 된다. 그의 아내가 알렉산더의 이복 누이동생인 테살로니케(Thessalonike)이다. 카산드로스는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알렉산더의 고향인 데르마를 그의 누이동생이자 자기 아내인 테살로니게의 이름을 따서 테살로니카(Thessalonika)로 짓고 도시를 대대적으로 성장시키게 된다. 그것이 성경에는 데살로니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름을 새로 짓고 도시를 건설한 것이지만 데살로니가 항구 도시 건설은 역사적으로 빛나는 치적이었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마게도니아 지역의 정치적 수도였으며, 그 후 비잔틴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 다음 가는 도시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는 BC 146년 마게도냐가 로마에 귀속되면서 마게도냐 주의 수도가 된다. BC 49년에는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시저)에 대항하다가 도망쳐서 도피생활을 했던 것이기도 하다. BC 42년에는 카이사르의 암살 주동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군대와 카이사르의 적통인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간의 역사적인 빌립보 전투가 2차례에 걸쳐 벌어진다. 그때 데살로니가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편을 들어 전쟁을 지원한다. 결국 데살로니가가 지원한 군대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 공로로 데살로니가는 더욱 발전하게 되어 콘스탄티노플 다음가는 대도시로 번성하게 된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암비볼리, 아볼로니아를 거쳐 이곳 데살로니가에 도착하게 된다. 그들은 제일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세 안식일 동안 복음을 전했다. 공식적인 바울의 전도 여행 중 가장 짧은 기간을 데살로니가에 머물렀던 것이다. 크게 번성한 도시이며 많은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많았지만 바울의 전도 사역은 순탄치 않았다. 유대인들이 집단적인 반발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동원했다. 바울 일행에 머물렀던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야손의 가족들을 끌어냈다. 그들을 관가로 끌고 가서 고발을 했다. 로마 정부가 가장 금기시하는 죄목을 덮어씌웠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행17:7). 로마는 황제를 신격화했다. 그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반역이나 다름이 없다. 황제 대신에 예수를 황제로 섬긴다는 죄목을 만든 것이다. 그 상황에서 바울은 더 이상 데살로니가에 머물 수가 없었다. 한 밤중에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과 그 일행을 몰래 베뢰아로 피신을 시키게 된다. 

하지만 바울이 머물렀던 기간이 짧았다는 것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다. 3주간 밖에는 복음을 전하지 못했지만 헬라인의 큰 무리들이 예수를 믿었다.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였다. 복음을 전한지 3주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데살로니가에는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비록 바울도 없고 목회자도 없었던 교회였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신실한 평신도들이 많았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난 지 불과 1-2년 후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며 데살로니가 전 후서를 쓰게된다. 바울의 서신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된 서신서 중 하나가 바로 데살로니가 전 후서이다. 교회가 세워진지 불과 1-2년 밖에 되지 않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이 그 서신서에는 그대로 나타나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직 어린 교회였지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가진 교회로 성장해 갔다(살전1:3). 더욱 놀라운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마게도냐(그리스 북부)와 아가야(그리스 남부)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바울이 칭찬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좋은 소문은 각처로 퍼져 나갔다(살전1:8). 바울이 직접 오랜 시간을 두고 양육하지는 못했지만 염려할 것 없이 스스로 성장했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다.

성 드미트리우스 교회
그리스는 전 인구의 98%가 그리스 정교회 소속인 크리스챤이다. 데살로니가 역시 거의 전 시민이 크리스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살로니가에도 1000년이 넘는 오래전 비잔틴 시대의 교회들이 20여개나 있다. 그 중 찾아가볼만 곳은 성 디미트리우스 교회이다. 디미트리우스는 AD 303년 디오클레시아누스 치세 때 아니면 AD 306년 막시미아누스 황제때 순교한 사람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해가 AD 313년이다. 바로 그 몇년전 신앙의 끝까지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택한 드미트리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AD 410년에 데살로니가에 기념교회가 건축되었다. 그후 7세기 재건축되었다가 1917년 화재로 타버리고 말았다. 지금 있는 교회는 1948년에 재건된 건물이다. 바실리카풍의 교회는 크게 집회장소용 홀과 세례 욕조가 있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특히 세례터는 성 디미트리우스가 갇혀 있다가 순교했던 장소에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비잔틴 문화 박물관
데살로니가에는 두 개의 박물관이 있다. 한 곳은 일반 유물이 전시된 ‘데살로니가 박물관’이며, 다른 한 곳은 비잔틴 제국의 유물이 전시된 ‘비잔틴 문화 박물관’이다. 그 중 특히 성지순례객들의 주목을 끄는 곳은 ‘비잔틴 문화 박물관’이다. 비잔틴 역사가 바로 기독교의 역사이기에 그러하다. 아직도 역사학자들 사이에는 비잔틴 제국의 시작과 끝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학자들 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의 비잔틴 박물관에는 비잔틴 역사에 대한 일목요연한 설명과 함께 그 역사에 따른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옮긴 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로 명명한 330년이 제국의 시작년도이다. 콘스탄티노플은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을 말한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의해 멸망한 1453년까지 무려 1100년 넘게 지속된 것이 비잔틴 제국이다. 수도를 옮긴 후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제국을 양분해서 동로마를 큰 아들 아르카디우스에게 맡기고, 서로마를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로 하여금 통치하게 함으로써 로마 제국은 둘로 나누어지게 된다. 결국 데오도시우스가 사망한 AD 395년 로마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으로 분리되었다. 비잔틴 제국이라 불리는 동로마 제국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제도를 이어 받았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발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서로마 분리된후 80년 후인 AD 476년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인 비잔틴 제국은 그 후도 1000년 이상 존속하게 된다. 비잔틴 문화 박물관은 기독교 역사와 문화로 가득채워졌던 비잔틴 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매우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