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조지아주의 전화회사 워런 베일리 회장이 88세를 일기로 사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유언장이 발표되면서 그 지역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이 일어났습니다. 1941년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이어받아 캠든 전화회사 사장으로 취임한 베일리는 그 지역에 해군기지와 종이공장이 들어서면서 거부로 성장을 했습니다. 거부가 된 후에도 베일리는 어려웠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말년까지도 패스트푸드점에서 저녁을 해결을 했습니다. 한달 7불의 쓰레기 수거비를 절약하기 위해 쓰레기를 직접 내다 버리는 근검 절약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언장에서 그는 그의 가족들에게는 불과 22만 달러만 남겼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6천만 달러를 자신이 출석하던 성마리아 연합감리교회에 아무런 조건 없이 헌금을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교회의 온 성도들은 환호를 하면서 좋아했습니다. 평소에 교회에 잘 출석하지 않던 사람들까지도 교회의 각종예배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 헌금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놓고 수많은 의견들이 쏟아졌습니다. 교회를 크게 건축해야 된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파이프 오르간을 비롯해서 교회의 비품들을 사자고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교인들 개개인의 빚을 그 돈으로 청산해 달라는 요구도 해왔습니다. 교회에 오는 성도들의 생각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그 돈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 지가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장로님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직회에서는 어떤 결의를 하는지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도들은 이 돈이 축복이자 짐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 교회의 데릭 매컬리어 목사님은 오랜 기도 끝에 성경에서 돈과 관련된 164개의 구절들을 찾아냈습니다. 이 구절들이 말하는 것은 돈이 탐욕과 유혹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돈은 결국 우리의 영을 속박하는 도구가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데릭 목사와 교인들은 거액의 헌금이 교회에 들어온 지 4개월 후 공동의회를 열었습니다. 교회의 긴급한 예산 22만 8천 달러를 제외한 모든 나머지 돈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4천만 달러는 비영리 법인에 쾌척을 해서 가난한 자들을 돕게 했습니다. 1천 6백만 달러는 그 지역에 있는 다른 어려운 교회들에게 기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277만 2천 달러는 고인의 뜻을 기려 베일리 장학재단을 설립하기로 한 것입니다. 아주 어려웠지만 이 믿음의 결정은 교회를 물질의 속박에서 해방을 시켰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지역 주민들 역시 교회의 결정을 칭송하게 되었습니다. 도움을 받은 작은 교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오히려 더 은혜가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누구에게나 거리낌이 없는 참 자유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이런 영적 자유가 꼭 필요합니다. 영적인 자유를 누리기 위한 두 가지 필수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 영적인 자유는 기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귀신이 들려 말을 못하는 벙어리를 예수님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마자 그의 닫혔던 입이 열렸습니다. 그는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말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다시 입을 열어주신 주님께 크게 감사했습니다. 기쁨과 놀라움은 이 사람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 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그들 역시 놀라움과 기쁨이 넘쳐 났습니다. 기쁨은 나누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옆에서 기뻐서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같이 기쁨이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언젠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월드컵 예선전 3 경기를 모두 한국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한국의 월드컵 열풍은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습니다. 밤이고 새벽이고 시민들이 길거리로 얼마나 쏟아져 나왔는지 모릅니다. 저도 아이들에게 거리응원 경험을 시켜주기 위해 분당에 있는 큰 경기장으로 갔습니다. 택시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가족들이 버스를 타고 분당에 갔습니다. 정류장에 내려서는 운동장까지 한참 되는 거리를 걸어서 갔습니다. 이미 그 넓은 운동장에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국 선수들이 조금만 잘하면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응원을 했습니다. 한국 팀이 골인을 넣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얼싸안고 춤을 추어댔습니다. 저희들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환호를 했습니다. 혼자보다는 여러 사람이 같이 하는 것이 기쁨이 훨씬 큰 것을 느꼈습니다. 기쁨은 나누어질 때 훨씬 커지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리석은 자의 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 가련한 남자가 너무 세상이 삭막하고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자살을 감행하기로 했습니다. 권총을 들고 마음의 준비를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날아간 세계는 한가지 별난 것이 있었습니다. 거기 사는 모든 사람들이 기쁨에 충만해 있었습니다. 항상 웃고 즐거워합니다. 삶에 생기가 있고 활발합니다. 이 남자는 자기가 동경하던 세계이기에 그렇게 사는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남자는 “기쁨이요”라고 만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한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기쁘게 만드는 것입니까?” 그 여자는 그 질문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 아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사방을 둘러보기만 했습니다.

  그는 그제서야 진정 기쁨에 차 있는 사람들은 말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기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낯선 사나이의 질문에 동요된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기쁨의 이유가 무엇인지 묻기 시작하면서 점차 기쁨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사나이가 그들을 타락시킨 것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비극을 가져온 사나이는 오히려 그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쁨을 말로 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글로도 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기뻐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기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이라는 은총이 문전에 있습니다. 다만 손을 뻗어 가지기만 하면 됩니다.” 천상의 일 중 가장 주된 일은 기쁨이라고 C. S. 루이스는 말했습니다. 완전한 영적 자유가 있는 천국에서 우리가 하는 가장 큰 일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주신 가장 큰 자유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공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잘되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잘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환경, 어떤 아픔 속에서도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기쁨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이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두 번째 영적인 자유는 한쪽을 분명하게 선택할 때 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영적 세력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중도를 지키는 것은 덕으로 인정받을 때가 많습니다. 어느 편에도 거들지 않고 중용을 지키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에 중립을 지키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더 혼란해 집니다. 신앙생활이 자유가 아니라 구속이요 속박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중세기 유럽의 기사도 정신은 나라를 지키고 부강케 하는 아주 훌륭한 정신이었습니다. 테니슨은 그의 작품 “왕의 전원시”에서 기사의 서약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삶은 순결하게, 말은 진실하게, 잘못된 것은 바로 잡고 왕을 따른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왜 태어났는가?”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할 좌우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삶의 추구는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목표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말씀을 따르는 삶이 우리 생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물같이 흐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목표는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마틴 루터 킹이 어느 연설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목숨을 버릴 길을 찾지 못한다면 목숨을 구할 길도 찾지 못합니다. 목숨을 바칠 일을 찾지 못한다면 목숨을 찾을 길도 찾지 못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참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어느 순간에서든 주님 한 분만을 선택할 때 우리는 영적인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이미 목숨을 버릴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마음에 번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부딪침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영적인 자유함의 자리로 점점 더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