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선교 여행 중 두 번째로 오래 머문 도시가 바로 고린도이다. 바울이 가장 오래 머물면서 복음을 전한 곳은 3차 선교 여행의 중심지인 에베소이다.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은 바울이 3년간 복음을 증거한 곳이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에서 2차 선교 여행을 마무리하게 된다. 파송교회인 안디옥으로 돌아가 그 동안의 선교보고도 하고 쉼을 가진 후 다시 3차 선교 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바울이 고린도 사역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가기 전 방문한 곳이 바로 겐그레아이다. 안디옥에서 불과 6마일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 사역을 하는 중에도 종종 들렸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왜냐하면 겐그레아에도 교회가 세워져 있었고 그 교회에 초대교회 신실한 여 집사중 한 사람인 뵈뵈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겐그레아
바울 당시 고린도에는 2개의 항구가 있었다. 북쪽 지역에 있는 항구에서 승선을 하면 로마나 이탈리아 다른 항구로 가는 가장 짧은 뱃길이 있었다. 반대로 남쪽 지역에도 항구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배를 타면 소아시아와 예루살렘 방향인 중동과 북아프리카로 갈 수 있었다. 이 남쪽 항구가 바로 겐그레아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적지 않은 규모의 항구였으며 그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항구 지역은 상업이나 무역이 발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린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지진으로 항구는 폐쇄가 되었고 지금은 해변길에 그 잔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더구나 고린도 운하가 이 북쪽 남쪽 항구를 연결하기 때문에 겐그레아에 항구를 새롭게 조성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겐그레아의 현재 지명은 케흐리에스(Kehries)라고 부르고 있다. 이 항구 이름은 신화 속의 포세이돈과 페이레네의 아들인 켄크레아스가 이 도시를 세운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AD 2세기에는 이 항구 옆에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다. 그 반대쪽에는 아스클레피오스와 아시스의 성소가 있었고 바다로 돌출해 나온 곳에는 포세이돈 신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포세이돈 신전의 남아 있는 기초석들 위로 아무런 관리자도 없이 바다물이 들락날락 거리고 있다.

나실인의 서원
고린도를 떠나기 전 바울이 겐그레아에 며칠을 머물면서 했던 가장 특기할 만한 일은 서원을 위해 머리를 깍는 일이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유로 머리를 밀고 서원을 했는 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2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새로운 3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다짐과 결의가 필요했을 것이다. 누가는 이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깍았더라”(행18:18). 바울의 서원은 이미 그 이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재서원, 재헌신인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나실인의 서원이라는 것이 나온다. 나실인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삶을 드리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나실인의 서원을 한 경우에는 세 가지 금지 사항이 있다. 첫째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아야 한다. 둘째는 머리를 밀지 말아야 한다. 셋째는 죽은 시체를 만지거나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포도주나 독주를 가까이 하면 분별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머리를 밀지 말라고 한 것은 자기 맘대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리 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하는 취지였다. 죽은 시체를 만지지 않도록 한 것은 그만큼 자기 삶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나실인이 된 이후에도 머리를 자르는 경우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실인의 삶을 포기할 경에 머리를 자른다. 두번째는 나실인으로서 삶을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경우 다시금 머리를 깍을 수 있다. 바울의 경우는 바로 이 두번째에 해당될 수 있다. 그가 하나님께 서약한 것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다른 방향으로 갔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 바울처럼 헌신적이고 신실한 하나님의 종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바울 스스로는 다시 한 번 지난 날을 돌아보고 새롭게 헌신을 다지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처음 은혜 받았을 때 우리는 눈물, 콧물 흘리며 오직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다짐은 기억속에서조차 희미해져 버리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겐그레아에서 다시 헌신의 서약을 하고 있는 바울처럼 첫 신앙을 다시 회복하고 남은 생애를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재헌신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겐그레아 교회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면서 신실한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된다. 그들과 함께 고린도 교회를 세웠을뿐만 아니라 고린도 주변 다른 도시들에도 교회를 세웠다. 그 주변 도시 교회들 가운데 하나가 겐그레아 교회인 것이다. 항구 도시였기에 많은 상인들과 여행객들이 들렸을 것이며 그들과 교류하는 시민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로마서 16장에는 바울의 선교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26명의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먼저 거론하는 교회가 바로 겐그레아 교회이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겐그레아 교회가 그 많은 교회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을 보면 바울의 정성과 사랑이 많이 쏟아부어진 교회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로마서를 쓰는 장소가 고린도이며, 그 고린도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지역이 겐그레아였기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최근의 연구에 의해 항구를 둘러싸고 있는 두 갑 위의 건물을 조사했는데, 남서쪽의 갑에서는 1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창고와 대리석을 깐 뒤쪽 건물과 4세기경에 지은 바실리카풍의 교회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뒤쪽 건물에서는 석고에 색유리를 박은 모자이크 그림으로 된 창이 발견 되었다. 한편 북쪽 갑에서는 2 세기경의 벽돌 건물이 발견 되었다. 겐그레아의 옛 폐허지에는 건물들과 방파제들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고린도 운하의 건설로 교회 터의 유적은 극히 일부만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물에 잠겨 있는 것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겐그레아 옛 항구 터의 흔적은 쓰러진 대리석 기둥과 기초석 등으로 알 수 있다. 지금 이곳에는 옛 항구의 모습을 입간판에 그려 놓아 그때의 모습을 알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림만 보아도 번성했을 항구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오늘날 옛 교회 터 옆 바닷가에는 바울이 머리를 깎은 것을 기념하듯 이발소 표지판을 세워 놓았다. 

겐그레아 교회 여집사 뵈뵈
바울은 겐그레아 교회를 소개하면서 적극 추천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겐그레아 교회의 여집사 뵈뵈이다. 그가 언제부터 바울의 사역을 도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겐그레아 출신이며 바울이 겐그레아 교회를 세울 때 가장 헌신을 했던 인물일 것이다. 교회가 세워진 후에도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기둥과 같은 사람이 되었다. 로마서 16장에 바울은 이 뵈뵈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롬16:2). 그를 극진히 영접하고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도와주라는 말이다. 특히 뵈뵈가 여러 사람과 바울의 보호자였음을 천명하고 있다. 여기서 ‘보호자’라는 말은 후원자라는 뜻이다. 교회를 세울 때 자기가 가진 물질을 아낌없이 내놓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한 바울이 사역하는 동안에도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채우는 사람이었다. 바울에게만 후원자가 된 것이 아니다. 복음 사역을 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최선을 다해 채워주는 사람이었다. 

여집사 뵈뵈가 바울의 마음에 큰 위안과 힘이 되었던 것은 바로 로마서를 로마까지 전달한 일을 자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바울은 3차 선교여행 중에 고린도에 들러 로마서를 완성했다. 로마로 가기 전에 미리 복음의 핵심인 로마서를 써서 그들에게 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 로마서를 수백마일 떨어진 로마까지 전달하는 일이 큰 일이었다. 그런데 나약한 여성의 몸으로 그 험한 길을 자원한 사람이 뵈뵈였던 것이다. 겐그레아가 바울 가슴에 이렇게 오래 남아있는 것은 바로 뵈뵈와 같은 신실한 종들이 섬기고 있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 가장 신실한 종으로 남아 있을 때 우리 교회는 주님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교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