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가정에도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안식처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서로 불편한 사람들이 없어야 합니다. 예배도 은혜가 됩니다. 말씀도 좋습니다. 예배 후 식사도 즐겁습니다. 하지만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이 모든 은혜를 놓쳐버리고 맙니다. 목장도 교회도 가고 싶어야 합니다. 하지만 불편한 관계가 있으면 발이 잘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사단은 평화를 방해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좋은 관계를 깨뜨리려고 했습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떠 넘기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여자가 선악과를 내게 주어서 먹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뱀이 나를 유혹해서 먹었습니다” 아내는 뱀을 끌어들입니다. 결국 하나님에게도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뱀이”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면 관계는 깨지고 맙니다. 사단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관계가 깨지면 불편합니다. 말 한 마리는 2톤의 짐을 싣고 마차를 끌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마리가 힘을 합쳐서 끌면 10톤의 짐도 끄는 것입니다. 하지만 같이 하려면 둘 사이가 좋아야 합니다. 평화는 우리에게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좋은 관계를 깨뜨려서 평화를 사라지게 하는 세 개의 높은 산이 있습니다. 모든 관계들은 이 산들을 넘어야 비로서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오해’라고 하는 산입니다. 대부분의 관계가 이 산을 넘을 힘을 갖고 있지를 못합니다. 서로에 대한 오해가 쌓이기 시작하면 파이크스 픽보다도 더 높게 쌓여집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입니다. 함께하는 처음 순간에는 아주 가벼운 언덕을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때 오해라는 큰 바위가 앞을 가로 막습니다. 신혼여행을 갔다가 이 산을 넘지 못하는 부부들도 꽤 많습니다. 동업자와 갈등이 생기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을 줄 알았습니다. 서로 힘을 합치면 못할 것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 두 달도 되지 않아서 갈등이 생깁니다. 두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 것입니까? 오해는 서로의 생각이나 의견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른 것이 나를 거부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의견 차이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나를 이해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오해를 풀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한 부인이 비행기의 탑승시간을 기다리며 대합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보딩시간이 좀 더 남았기에 서점에서 산 신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신문을 사면서 무료함을 달랠겸 과자도 한 봉지를 사서 가방에 넣어두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신문을 한참 보고 있는데 옆 자리에 앉은 신사가 자기가 산 과자를 하나씩 꺼내서 먹는 것이 옆으로 보였습니다. 부인은 점잖은 신사가 남의 과자를 훔쳐 먹는 염치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인은 자기의 과자를 그 사람에게 다 빼앗길 수가 없어서 봉지에서 과자를 꺼내 자기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신사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남의 과자를 갖다 먹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더욱 마음이 불편해진 부인은 봉지 속에 있는 과자를 하나만 남겨놓고는 모두 한 주먹에 집고는 다 먹어버렸습니다. 그때 옆에 앉은 신사는 손을 넣어 마지막 과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반으로 쪼갠다음 그 반조각을 봉지에 다시 남겨 놓고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자 부인은 더욱 화가 나서 반 조각이 남아 있는 과자봉지를 단숨에 낚아채서 그녀의 가방에 쑤셔 넣었습니다. 그런데 가방에서 이상한 것이 만져졌습니다. 가방속에는 아직 뜯지도 않은 과자 봉지가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과자는 그대로 가방에 두고 지금까지 그 신사의 과자를 가지고 그런 불편한 마음과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해입니다. 멀쩡한 신사를 도둑으로 몰아버리고 맙니다. 더 이상 상대조차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관계의 어려움이 생길 때 우리는 가장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혹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두 번째 평화를 사라지게 하는 산은 ‘나 먼저의 산’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늘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이 먼저 나한테 맞춰주면 그때 내가 당신에게 맞춰주지.”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우리 마음은 이런 태도로 나갑니다.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맞춰주려면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내게 맞춰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생각할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얼마나 얻을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관계가 자꾸 깨지는 것은 이런 이기적인 모습을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처음 한 두 번은 그냥 넘어갑니다. 하지만 자기 것만 챙기는 것을 보면 속이 상하기 시작합니다. 교회 사역을 하면서 제가 한 가지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돌아가면서 하자’는 말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그리고 합리적인 제안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분담을 하는 것입니다. 순서대로 돌아가면 일도 쉽고 편해집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곧 문제를 일으킵니다. 모두가 내 마음 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하기 싫은 사람은 억지로 의무감때문에 합니다. 순서대로 하는데 빠질 명분이 없습니다. 처음에 몇 번은 불편함을 표시내지 않고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곧 불평이 생깁니다. 섬기는 일에도 성의가 없어집니다. 이런 저런 문제로 빠지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그 사람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는 분들도 마음에 상처가 됩니다. 좋자고 하는 건데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다른 사람이 하느냐 마느냐를 너무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감사하고 즐거워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많이 했다고 적게 한 사람을 지적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그런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결과는 그 다음에 나타납니다. 자원해서 하겠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열심히 감사해서 기쁨으로 하는 사람을 보고 나도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깨뜨리는 험산 준령의 마지막 봉우리는 ‘실수’라는 산입니다. 실수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관계를 갖다 보면 실수도 하고 일을 그르칠 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상대방이 했던 말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상대방에게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관계에서 한 번 상처를 입으면 더 이상 관계를 발전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머물러 있거나 오히려 뒤로 후퇴하고 맙니다. 산이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다시 그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방어부터 합니다. 결국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일을 크게 잘못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씻을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했습니다. 일을 아주 그르치고 만 것입니다. 주님이 죽는 곳까지 따라가겠다던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대제사장 집의 하녀 앞에서 말입니다. 사실 주님과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다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후회가 막심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었는지 자기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변명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진심을 믿어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명백한 잘못이요 실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를 만나셔서 어떤 책망도 추궁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단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에 걸쳐 묻기만 하셨습니다. 주님을 부인한 것은 베드로의 본심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얼떨결에 주님을 부인하고 만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에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상처 주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면 됩니다. 그러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관계에 평화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의욕을 가지고 새삶을 살아보겠다고 고기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 후 그는 초대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한 번의 설교로 3천명, 5천명을 회개시키는 복음의 거장이 됩니다. 관계가 나쁘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하지만 좋은 관계로 마음에 평화가 넘쳐나면 주님 나라를 위해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