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선교 사역 중 가장 오래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던 도시가 바로 에베소이다. 무려 3년간을 한 곳에서 선교 사역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에베소가 선교전략에 있어서 요충지였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에베소는 단지 에베소 한 도시의 복음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에베소를 기점으로 비록 바울이 방문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인근 지역으로 복음이 전파되어갈 수 있는 세계 복음화의 초석이 되는 것이다.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교회 역시 바로 이 에베소 교회를 기반으로 세워졌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특히 바울이 3년간 복음을 전했던 두란노 서원은 바로 에베소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선교의 센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에베소의 역사
BC 1,100년 경 이오니아인인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레스에 의해 세워진 도시가 바로 에베소이다. 그 당시는 척박한 그리스 본토를 떠나 비옥한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지금의 터키 서부 해안가)으로 대거 이주해서 그리스계 도시들을 건설하는 것이 성행하던 시대였다. 안드로클레스 왕자도 당시 전통에 따라 새 도시를 에베소에 세운 것이다. 그 이후 에베소는 점차 항구 도시로 발전을 거듭하기 했다. 그 후 서양 세계와 동양 세계의 대 전쟁인 페르시아 전쟁, 알렉산더 정복 전쟁을 거치면서 그 길목에 있던 에베소는 세계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게 된다. 에베소의 황금기는 BC 133년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면서부터이다. 수많은 국제회의가 에베소에서 열리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동서양을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각광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각 나라의 상품들이 에베소로 모이게 되었다. 무역항구로서 에베소는 엄청난 부까지 쌓이게 되면서 세계 최대 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혔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당시의 에베소는 인구가 30만 명에 달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두란노 서원
당시는 교통 수단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에 지역마다 방문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럼에도 바울은 동역자들과 함께 험준한 산맥을 넘기도 하고 바다와 강을 건너가면서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러나 보다 효과적인 선교는 각지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런 선교 전략에 가장 적합한 도시가 에베소였던 것이다. 에베소는 로마 제국 최고의 도시이며 세계 각국의 상인과 여행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자기 나라나 도시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이 직접 가지 않고도 똑같은 선교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세워진 교회가 골로새 교회이며 소아시아의 다른 6개 교회도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세워진 것이다. 이런 복음 증거의 효과를 얻으려면 지정된 장소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두란노 서원은 그런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다. 바울은 이 두란노 서원에서 에베소에 머무는 3년 내내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선교의 산실이었다. 그렇다면 이 두란노 서원은 에베소 어디에 있었을까? 정확한 고고학적 자료가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당시 에베소 시가지의 중심에 서 있는 셀수스 도서관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셀수스 도서관은 지금도 2천년이 지났지만 가장 아름다운 유적지로 정평이 나 있다. 물론 여러 번에 걸친 건물 보수작업이 이루어졌지만 그 골격은 거의 원형 그대로이다.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서관이었다. 당시 장서만도 12,000권을 보관하고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도서관이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중심지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었기에 바울이 이 셀수스 도서관에서 매일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아데미 신전
아데미 여신은 아나톨리아(터키 서부 해안 지역)에서 가장 신성시 하였던 신으로 처음에는 킬벨레라 불리웠다. 이 여신은 아나톨리아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 전체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로마와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에서도 섬길 정도였다. 아랍인은 이 아데미를 ‘라트’로 불렀고, 이집트에서는 ‘이시스’로, 로마인들은 ‘디아나’로 불렀다. 그리스에서는 ‘아르테미스’로 명명되었고,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고 최초의 도시를 세운 이오니아인들이 불렀던 것이 바로 ‘아데미’였던 것이다. 다산과 비옥을 상징하는 아데미를 에베소 사람들은 에베소의 수호신으로 섬겼다. 당시 에베소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바로 이 아데미를 섬기는 아데미 신전이었다. BC 7세기 경부터 짓기 시작한 이 신전은 120년에 걸쳐서 건축이 되었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이 신전은 지구상 어느 신전보다 크게 짓기를 원했다. 그 결과 규모에 있어서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에 달할 정도였다. 길이가 115m, 폭이 55m에 높이 19m에 이른다. 신전을 떠 받치고 있는 대리석 원주가 무려 127개가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신전이었던 관계로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에베소 사람들이 얼마나 이 아데미 신전과 아데미 여신을 좋아하고 섬겼는지는 지금은 셀축이라고 불리는 옛에베소 시청 앞에 그 신상이 세워져 있을 정도이다.

당시 매년 5월에 벌어졌던 아데미 여신의 축제는 온 에베소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아데미 여신은 가슴에 유방이 24개가 달린 풍요의 여신이다. 아데미 여신의 축제일이 되면 유방의 같은 수의 24명의 흰 옷을 입은 여자 사제들이 앞에 서고, 뒤에는 자신의 고환을 아데미 여신에게 바친 남자 사제들이 여신의 호위병처럼 뒤따른다. 축제의 행렬은 아데미 신전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출발한 아데미 신상과 출제 행렬은 에베소 시의 동쪽에 있는 마그네시아 문을 통해 입성하고, 체육관과 시장, 음악당을 지나서 에베소 시청에 이른다. 에베소 시청 앞에서는 또 하나의 아데미 여신상이 밖을 향하여 서 있는데 두 개의 여신상이 만나게 되면 군중들의 열광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때, 에베소의 총독이 관저에서 나와서 아데미 여신에게 경배를 하게 된다. 총독의 경배를 받은 아데미 여신상은 중심도로인 그레테 도로를 지나 셀수스 도서관을 거쳐 에베소 광장에 이른다. 다시 광장에서 왼쪽 방향으로 항구로 가는 도로를 지나 부두에 이르게 된다. 부두에 이르면 그곳에서 소들을 바치는 희생 제사가 드려진다. 남자 사제들이 24마리의 황소 고환을 잘라 아데미 여신의 목에 걸어주면, 군중들이 함성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무용수들은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도살된 소들이 제단에 올려지면 아데미 축제는 무르익게 된다. 

마술가들의 회심과 하나님의 열심
이 아데미 축제에는 에베소 사람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전세계적인 축제였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아데미 신전에 들어가려면 아데미 우상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했다. 신전에서만 우상에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에베소의 각 가정에도 이 아데미 우상을 반드시 소장해야 했다. 외국에서 여행을 오는 사람들도 아데미 우상을 사 가지고 가는 것이 꿈이고 소망이었다. 그러기에 아데미 우상 산업은 에베소의 경제를 지탱해 주는 핵심 산업이 되었던 것이다. 데메드리오는 에베소에서 아데미 우상을 만드는 큰 공장을 운영하는 대표적 상인이었다. 그는 에베소의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들이 만든 아데미 우상이 팔리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바울의 복음 전도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 것은 절대 신이 아니다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 말씀에 도전과 은혜를 받은 마술가들이 마술책들을 길거리고 가지고 나와 불사르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는 결심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이들을 믿고 따르던 시민들이 갑자기 아데미 우상을 사지 않자 데메드리오는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곧 자기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수많은 시민들을 모았다. 그리고 바울과 그 동역자들에게 위협을 가했다. 아데미 여신을 무시한다는 죄목은 에베소 전 도시에 분노의 불길을 타오르게 만들었다. 아데미의 영광을 회복시키지 않으면 에베소는 망하게 될 것이라고 선동을 했다. 도시의 곳곳에서 소요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