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공학연구소에서 미국에 산재한 수많은 크고 작은 회사들을 상대로 연구를 한 것이 있습니다. 이 연구는 같은 시기에 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한 회사들이 어떤 회사는 몇 년 안에 무너지고 어떤 회사는 왜 성장을 거듭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기술이 다른 회사보다 뛰어나게 발달된 회사가 성공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연구 결과 새로운 기술, 뛰어난 기술의 회사 공헌도는 불과 15%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회사를 성장시키고 발전시켰을까요? 그 연구보고서는 놀랍게도 회사 직원들의 인간관계가 회사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회사 발전의 85%를 인간관계가 감당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해도 인간관계가 나쁘면 일에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조금만 참으면 미래가 보장되는 일이라 해도 관계가 나쁜 사람과는 하루도 같이 일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서로의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새로운 기술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아름다운 관계가 있으면 일하는 의욕이 넘쳐흐릅니다. 서로를 인정해 주는 기쁨이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 달려가지 않습니다. 네가 잘되고 내가 잘되는 기쁨이 있습니다. 말 한 필이 마차를 끌 때 2톤의 무게를 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 두 필이 멍에를 같이 해서 마차를 끌면 4톤의 무게를 끄는 것이 아닙니다. 자그마치 20톤의 무게도 끌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이 일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할 때보다 의욕이 훨씬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절대 혼자 힘으로 유지되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한 마음으로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의 단순한 의지로 모인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셨습니다. 값을 주고 사신 하나님이 우리를 이 교회에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구원하신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존귀히 여겨서 불러 주신 성도들을 우리도 역시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자신을 존귀히 여기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과 동역하는 것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야 할 아름다운 신앙공동체의 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창립 51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반백년이 넘는 세월입니다. 우리교회가 앞으로도 계속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에게 세 가지 책임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형제에 대해 책임을 질 때 아름다운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동업을 하다가 사이가 더 나빠져서 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맞아 동업을 했는데 결국은 싸우고 원수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동업자가 원수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득은 더 많이 챙기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보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기적인 사람과 동업을 하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신앙공동체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는 힘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끝까지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있을 때 교회는 놀라운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부산에는 어른들이 10,000명이 모이는 서부교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가장 큰 특징은 어린 초등학생들이 어른보다 많은 12,000명이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어린이 전도와 교육에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곳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역사가 가능하겠습니까? 놀랍게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특별한 교육방법이나 자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교회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단순한 교육방법입니다. 교육시설이 현대적으로 잘 갖추어 진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본당에서 의자 하나나 둘에 한 반씩을 놓고 가르칩니다. 계단에 앉아 교육을 시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 자신입니다. 그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교사를 임명할 때 절대 학생을 주지 않습니다. 자기가 가서 전도해 와야 합니다. 아이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눈 높이를 낮추어야 합니다. 아이들의 언어로 놀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녀들의 친구들을 전도하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기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자녀들을 먹이고 학교에 보내기만 하면 책임을 다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교사가 되고 부터는 달라진다고 합니다. 자녀들의 영혼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교사의 직분을 절대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가장 영예스러운 직분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교사의 직분입니다. 영혼에 대한 책임을 가장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책임을 기꺼이 수행합니다. 특별히 먼 지방으로 이사를 가는 경우가 아니면 교사 직분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이런 책임의식이 그 교회를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인기독교회에서 가장 영예스러운 직분은 목자, 목녀입니다. 목원들의 영혼을 책임지는 목자, 목녀들이 많이 나올 때 우리교회는 가장 아름답게 성장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 자신의 믿음에 대한 책임을 질 때 아름다운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집니다. 가나안 정착 시기 르우벤과 갓지파는 요르단 땅으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므낫세 반지파는 시리아에 정착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불과 한 두 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급속도로 이방 나라에 동화된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지 않으니까 자녀들을 그 나라 사람들과 결혼을 시키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보기에 결국 그들은 지금의 아랍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있던 나머지 지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도 역시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많이 보냈습니다. 외세의 침략도 많이 받았습니다. 가나안 정복 후에 곧 이어진 사사 시대는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나라의 조직도 없고 군대도 없었습니다. 각 지파는 자기 생각에 맞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지파들이 서로 싸우고 전쟁을 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바람 앞에 작은 등불 같은데 꺼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산들바람에도 꺽어질 것 같은 상한 갈대 같은데 정작 꺽이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포기할 만도 한데 또 일어섭니다. 세계 최강의 제국들인 애굽이 쳐들어옵니다. 앗수르가 세계를 정복하면서 이스라엘을 유린해 버렸습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유대의 왕을 두 눈이 뽑힌 채 끌고 갔습니다. 70년간 속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헬라 제국이 쳐들어옵니다. 로마가 한 손에 잡고 흔들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없어져도 벌써 없어져야 할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건재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것은 다 버려도 자기 믿음만은 지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강한 나라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을 지킬 때 가정이 지켜지고 교회가 든든하게 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눔에 대한 책임을 질 때 아름다운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집니다. 얼마 전 환경학자인 도넬라 메도스 박사의 신문 칼럼이 인터넷과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서 화제를 모은 적이 있습니다. 그 칼럼은 “세계가 만일 1백 명의 마을이라면” 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저도 이 글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70억이 살고 있는 지구를 1백 명이 사는 마을로 가정을 한 것입니다. 별의 별 사람들이 다 모여 사는 지구촌에서는 힘 없는 소수들이 실제로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구촌에 사는 백 사람 중 20명은 영양실조에 걸려있습니다. 25명은 비와 이슬을 피할 집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17명은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백 명 중 92명은 은행에 예금이 없습니다. 지갑에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집안에는 잔돈조차 굴러다니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구촌 100명 중 99명은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14명은 글도 읽지 못합니다. 백 명 중 20명은 공습이나 폭격의 위협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갑니다. 절반 가까운 48명은 체포나 고문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신앙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얼마나 특혜를 받고 살아가는 것인지 모릅니다. 100사람 중 단 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축복을 이웃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덴버사회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야 축복도 계속 유지되는 것입니다. 메도스 박사는 이 칼럼의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먼저 당신이 손을 내미십시오. 당신이 먼저 사랑해 주십시오. 당신과는 다른 사람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