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그 생을 마감합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무한한 것이 아닙니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하나의 단락입니다. 삶의 단락을 맺어주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사실 죽음으로 세상의 삶은 완전히 끝이 나고 맙니다. 죽음은 분명 슬프고 고통스런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의 삶을 정리해 줍니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과 풍랑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잘 죽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사는 것은 그래도 기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은 더 이상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에 결정되고 맙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잘 죽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죽는 것도 복을 타고 나야 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슬픈 최후를 맞는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의 시작은 너무 아름답고 멋진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사실 고려왕조의 왕건, 조선왕조의 이성계와도 같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되는 축복된 자리였습니다. 그의 자손 대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만드는 가장 존경스런 시조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결국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아무것도 남기지도 못했고 자손들에게 물려주지도 못했습니다. 그가 죽는 장면 역시 성경에서 가장 슬픈 장면 중에 하나입니다. 세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불레셋 병사들에게 죽는 광경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자신도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사울의 슬픈 최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신조차도 마구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입었던 갑옷이 벗겨졌습니다. 잘려진 머리는 불레셋 땅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몸은 벧산 성벽에 달리고 맙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광경을 외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사울의 마지막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여주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합니다. 죽음은 곧 우리가 살았던 인생길의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슬픈 최후를 맞지 않으려면 살아가는 동안 세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슬픈 최후를 맞지 않으려면 영적인 조언자를 멀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생애 말년 불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릅니다. 불레셋은 이스라엘을 전멸시키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예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느낌이 이상합니다. 패배할 것 같습니다. 결국 그는 지금까지 전혀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불레셋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는 평상시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싶어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에 확신도 오지 않았습니다. 너무 불안하고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것이 바로 무당입니다. 옷까지 바꾸어 입었습니다. 신분을 위장했습니다. 왕이 무당을 찾았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급하면 이렇게 하겠습니까? 무당을 만나서 무엇을 물었을까요? 전쟁에서 이기는 지를 물은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초혼’이라고 부릅니다. 무당들이 많이 하는 일입니다. 죽은 자의 혼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기에서 도움이 될 사람은 사무엘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사무엘이 누구입니까? 사울을 왕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그에게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던 사람입니다. 사울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잘 되기만을 바랬습니다. 그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옆에서 늘 도와주었습니다. 사울에게 영적인 조언자였습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힘이 생기자 가장 먼저 사무엘을 멀리했습니다. 권위가 생기자 사무엘을 귀찮아 했습니다.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조언을 하면 죽음의 위협까지 느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 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이 슬픈 결말을 가져온 것은 평상시 영적인 조언자를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끝까지 기도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믿음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조언해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슬픈 최후를 맞지 않으려면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울의 평생 삶에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기 중심의 삶입니다. 늘 자기가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남이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중심에 놓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왜 그렇게 죽이려고 한 것입니까? 바로 질투 때문입니다. 다윗이 자기보다 높아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이 살아 있는 한 사울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죽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윗 문제가 아닙니다. 제2, 제3의 다윗은 끊임없이 나타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그들을 전멸시켜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5백년 동안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아말렉을 반드시 진멸하시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대답은 시원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 왕도 사로 잡아 왔습니다. 무수한 동물들을 전리품으로 끌고 왔습니다. 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느냐고 사무엘이 추궁을 했습니다. 그때 사울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백성들이 그렇게 하자고 해서” 참 궁색한 변명을 합니다. 왕을 잡아서 자기의 위용을 떨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좋은 동물을 끌고 와서 자기 재산을 더 증식시킬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이 자기 중심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5백년 동안 생각하신 것을 사울에게 명령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순간적으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더 나은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은 빨라야 이기지 늦으면 진다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기념비에 자기 이름을 새겼을지는 모릅니다. 가축의 울타리가 더 넓어졌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버림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떠나시고 맙니다. 하나님이 그를 떠나자 악령이 그에게 들어왔습니다. 사울의 비참한 최후는 이 때부터 예견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슬픈 최후를 맞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최선을 다해 활용해야 합니다. 불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왕자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달아 놓았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사울을 장사 지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잘못 들키면 불레셋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의 시체는 독수리나 동물들에게 뜯기고 말 것입니다. 얼마나 비통한 상황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벧산 성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근처에도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요단 동편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지금의 요르단 지역입니다. 그러기에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벧산과는 15마일 이상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길르앗 야베스는 목숨 걸고 사울의 시체를 가져오기로 결정했습니다. 모든 장정들이 밤새 달려갔습니다. 사울과 왕자들의 시체를 가져다가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마을 사람들이 7일 동안 금식하며 이들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런 선의를 베풀 수 있었던 것일까요? 40년 전 사울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왕이 되기도 전입니다. 단지 기름부음을 받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암몬 군대가 길르앗 야베스를 쳐들어왔습니다. 사울은 몰고 있는 소를 열 두 조각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12지파에게 한 조각씩을 보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를 침공한 암몬을 물리치자고 독려했습니다. 그때 무려 33만명의 군대가 모여들었습니다. 암몬에게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때부터 길르앗 야베스는 사울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사실 사울에게는 남들이 갖지 않은 좋은 은사들이 많았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알았습니다. 남을 도울 줄 알았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우면 40년간 그 은혜를 기억하고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그런 은사들을 한 번만이 아니라 평상시에 계속 사용했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슬픈 최후는 맞지 않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