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P31’이라는 책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P31’은 ‘Proverbs 31’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잠언을 뜻하는 것입니다. 잠언이 31장까지 있습니다. 세계적인 건축 설계 회사인 ‘팀하스’의 하형록 회장이 쓴 책입니다. 미국에서 젊은이들이 입사하고 싶은 건축설계회사 1위에 선정될 정도로 ‘팀하스’라는 회사는 명성이 높습니다. 이 회사는 철저하게 성경대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P31’도 잠언의 말씀에서 회사 운영 원칙을 세운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잠언 31:24을 중심으로 하나의 운영 원칙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 나옵니다. “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맡기며” 당시 베는 가장 값나가는 옷감이었습니다. 귀한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서 파는데 상인들에게 띠를 달아서 넘긴다는 말입니다. 띠는 장식을 말합니다. 그냥 상품만 넘기는 것이 아니라 예쁘게 포장까지 해서 넘긴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포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제 값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상품은 포장값이 더 나갈 정도로 심한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물건을 포장하는 데 돈을 들일 이유가 전혀 없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남들보다 더 친철하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 이 말씀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 회장은 이 말씀을 ‘엑스트라 마일’로 보고 있습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는 자가 가져야 할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팀하스 회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세 가지 실천 행동을 정했습니다. 첫 번째는 주어진 일보다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시공이 다 끝난 후 1년간 무상 보수 공사를 해줍니다. 형식적인 워런티 조항이 아닙니다. 11개월이 지난 후 고객의 사업장을 방문합니다. 건물이 괜찮은지, 보수할 곳은 없는 지를 알아보고 미리 고쳐주는 것입니다. 고객들이 얼마나 고마워하는 지 모릅니다. 두 번째는 보고를 잘하는 것입니다. 일처리에는 마감시한이 있습니다. 일이 그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인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속 날이 지나고 나서 여러가지 변명을 합니다. 하지만 팀하스 회사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미리 고객들에게 보고를 합니다. 일이 얼마 만큼 진척이 되었는지를 미리 알려줍니다. 보고를 잘하면 고객의 마음은 굉장히 편해집니다. 종종 능력은 뛰어난데 보고를 게을리 해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 번째 그 회사의 실천 사항은 그 날 안에 반드시 리턴콜을 하는 것입니다. 문의 전화이든 항의 전화이든 연락이 오면 바로 응답을 합니다. 이메일이나 텍스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일도 바쁩니다.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그날 바로 리턴콜을 하는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객은 얼마나 회사를 신뢰하는 지 모릅니다. 엑스트라 마일은 기분 좋으면 베푸는 선심이 아닙니다. 주인이 부르면 종이 달려가듯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실천하는 이 회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존귀해지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삶의 이유가 분명했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에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세 가지 삶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 위해서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부끄러움은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재판하는 벨릭스 총독앞에서 자신 있게 말합니다. “나는 결코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삶의 철칙이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곳마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았습니다.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했다면 복음을 바로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종종 사람은 보지 말고 하나님만 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맞는 이야기 같습니다. 사람을 보면 실망하니까 하나님만 보고 교회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는 분입니다.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집니다. “그 사람 그 교회 나간데!” 이런 말 한 마디가 하나님의 영광을 얼마나 가로막는 지 모릅니다.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과 계약을 맺지 않습니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과는 함께 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이삭은 그랄 땅에 살면서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진실했습니다. 정직했습니다.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양보하기를 즐겨했습니다. 손해를 보면 보았지 그랄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존귀해졌는지 모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문제이다” 믿는 사람은 양심에 거리끼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려면 오직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지난 4월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때 빌립보를 가보았습니다. 원형극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바울이 갇혔던 감옥이 일부분 남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몸에서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의 숨결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 없이 갇힌 것이 바울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죽을 정도로 매를 맞은 것이 아프거나 속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라와 함께 그 감옥에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 찬송소리는 감옥의 쇠창살을 뚫고 밖으로 새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강한 어둠의 권세도 그 찬송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찬송소리는 하늘 보좌까지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찬송를 듣자 마자 빌립보 감옥에 지진을 일으키셨습니다. 옥문이 열리자 죄수들이 도망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본 간수가 칼을 빼서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크게 소리를 질러 간수가 자결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옥문이 열렸으면 도망을 치는 것이 가장 우선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달랐습니다.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안해 하는 간수를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절대 나부터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도 하나님이 살리시면 사는 것입니다. 간수는 그런 믿음을 가진 바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바울의 믿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날 간수의 온 집안이 구원을 얻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옥문이 열릴 때 혼자 살려고 도망쳤다면 혼자는 살았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간수의 온 식구들을 구원하고 빌립보 교회를 세우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큰 역사를 일으키는 법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려면 꿈 너머 꿈을 가져야 합니다. 11살에 하나님께 이런 편지를 쓴 소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제발 제가 배우가 되게 해주세요. 예쁜 장면에 많이 나오게 해주시고, 화장도 예쁘게 해서 올리비아 뉴톤 존처럼 보이게 해주세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같은 배우랑 키스도 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영화배우가 되는 꿈을 키우고 있는 한 소녀의 바램이었습니다. 그녀는 9년 후 20살에 영화에 처음 출연해서 그 꿈을 이루게 됩니다. 3년 후 23살 때는 18억달러라는 전세계적으로 큰 흥행성적을 올린 작품의 주인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바로 영화 ‘타이태닉’의 여주인공 케이트 윈슬렛입니다. 그는 11살 때의 꿈대로 남자 주인공인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잊지 못할 키스도 나누게 됩니다. 열한 살 소녀의 꿈은 멋지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꿈이 있으면 행복해집니다. 하지만 멋진 영화배우가 되려는 것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반쪽짜리 꿈에 불과합니다. 유명한 영화배우가 된 다음에는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이것이 꿈 너머 꿈입니다. 바울의 인생은 눈에 보이는 목표를 이루고 성과를 내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만 존귀해지는 것이 그의 꿈너머 꿈이었습니다. 지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최종목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만 한다면 자신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상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우리의 꿈이요 목표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통해 주님이 존귀해지는 것을 꿈너머 꿈으로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