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주제로 만든 다큐멘타리 영상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런던 윔블리 스타디움이 나옵니다. 락밴드(Rock Band)가 광란에 가까운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7만 명의 관중들이 마약과 술에 취해 괴성을 지르며 몸을 흔들어 댔습니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관중들은 계속해서 앵콜을 외쳤습니다. 그 공연은 무려 12시간 동안이나 지속이 되었습니다. 그 때 무대 뒤에서는 오페라 가수 제시 로만이 자기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제시 로만은 공연 제작자와 함께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찬송가는 잔인하고 야비한 노예 무역상이었던 쟌 뉴톤이 만든 것입니다. 노예를 잡아다 팔기 위해서 출항을 했던 어느 날 뉴톤의 배는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된 상황에서 뉴톤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독기와 광기만 서려있던 그의 얼굴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거부할 수 없는 은혜가 그에게 몰려왔던 것입니다. 뉴톤은 노예 무역상의 직업을 즉시로 내려놓았습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를 전하는 목사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목사가 되어서도 노예 제도를 폐지하는 일에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는 일생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만든 것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라는 찬송가입니다. 영어로는 ‘Amazing Grace’라는 유명한 곡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제시 로만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현란하게 비추던 화려한 무대 조명도 사라졌습니다. 악단도 없고 악기도 없었습니다. 오직 제시 로만 만이 무대 중앙에 서 있었습니다. 관중석에서는 갑자기 가라 앉은 분위기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락 음악을 더 듣자고 소리졌습니다. 관중들의 불만은 곧 야유의 함성으로 바뀌었습니다. 무대에서 당장 꺼져버리라고 로만을 위협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제시 로만은 아주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 날 밤 윔블리 대형 스타디움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광기로 외쳐대던 7만 명의 관중들이 노만이 부르는 은혜의 찬송 앞에 침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노래가 2절에 이르자 관중들은 이 찬송 속에 잠겨 버렸습니다. 3절에 이르자 관중들은 오래 전에 들었던 가사를 더듬으면서 찬송을 따라 불렀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그들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순간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기쁨과 평안이 그들의 마음에 밀려온 것입니다. 4절에서 그들은 완전히 천국 백성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세상은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단지 은혜를 세상의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허상입니다.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잠시 쾌락은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연장을 빠져 나가고 나면 또다시 허전함이 밀려옵니다. 공허만이 마음에 가득찹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은혜를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은혜를 주실 수 있습니다. 은혜가 임할 때 세상은 그 앞에서 침묵에 잠기게 됩니다. 저는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세계 역사도 좋아하고 한국 역사도 즐겨서 읽습니다. 성경역사와 세계 역사의 연결점을 찾는 것은 저에게 큰 즐거움 중에 하나입니다. 한국 역사 중에도 한국 초대교회 역사도 관심있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역사는 그냥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사람을 압니다. 역사를 연구하면 오늘의 나를 볼 수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야 보다 나은 우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눈물의 섬 강화이야기’라는 초대 교회 책을 읽고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강화도에 기독교가 전래된 과정을 담아낸 한국교회 역사책입니다. 1800년대 말 강화도는 그야말로 열강들의 발길에 무참히 짓밟힌 곳입니다. 조선 정부에서는 강화도를 최후의 기지로 삼아 방어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섬주민들이 죽거나 다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와중에 복음이 소리 없이 강화도에 들어왔습니다. 복음은 그 고난의 현장에서 놀랍게 퍼져나갔습니다. 복음은 부모 형제를 잃고 허탈해 하는 주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내일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강렬한 소망이 되었습니다. 어떤 마을은 전 주민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찬송가가 전혀 없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주민들의 입과 입을 통해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는 찬송가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초대 교인들의 신앙이 어떤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10절까지 나오는 긴 찬송가가입니다. 그들은 이런 찬송을 불렀습니다. “사막에는 모진 광풍 육지에는 눈비 오고 해상에는 거친 물결 때때 일어 쉬지 않고 진진 한재 종종 있고 독창 악질 유행하여 위험천만 평안 없고 안심 못할 세상이라” 이것이 1절입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2절에는 가난과 압제에 시달리는 현실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빈궁하여 압제 받고 세력 없어 당한 억울 어디다가 호소할까 원한 품은 눈물일세 부모 죽어 원주 지퉁 자식 죽어 생명 지퉁 과부되고 상처하니 어이 탄식 눈물일세” 참 억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원통하고 분해도 어느 한군데 호소할 때도 없습니다. 자녀 죽고 부모 죽고 상처까지 합니다. 무슨 힘으로 살까요? 3절에는 그런 고통과 아픈 현실에도 천국을 향하는 희망이 묻어나옵니다. “고해만리 조각배에 창해일속 이몸 싣고 천국 향해 출발하니 환란심야 지침이라 가진 풍파 모든 위험 악전 고통 인내하고 멀리 천성 바라보고 희망으로 건너간다” 고통과 환난의 나날 들입니다. 하지만 천국을 항해하는 희망이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은 4절에서 절실하게 나타납니다. “갓가온다 갓가온다 내본향이 갓가온다 한걸음씩 갓가온다 나의 본향 갓가온다 예루살렘 내복된 집 멀리보고 즐겁더니 이제와서 묵도하니 화려하고 찬란하다” 천국을 바라보자 힘이 솟습니다. 즐거움이 없는 세상입니다. 고난과 슬픔만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천국을 가슴에 품자 즐거움이 솟아납니다.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당한 수많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여기서 우리가 누구일까요?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자를 말합니다. 사방에서 누르고 있습니다. 답답해서 아무것도 못합니다. 오랜 투병으로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에게 버린바되고 무시받은 것을 말합니다. 복음의 대적자들은 바울에게 온갖 위협과 핍박을 가했습니다. 감옥에 집어 넣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돌을 던져서 죽음 직전까지 가게 했습니다.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망하는 것 같아도 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버린다고 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더 힘차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바울 역시 질그릇입니다. 깨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질그릇 속에 은혜를 담았습니다. 바울의 이 놀라운 고백 바로 전 절인 고후 4:7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사실 힘이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이 큰 어려움을 당당히 헤쳐나갈 용기도 없습니다. 능력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바로 보배입니다.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 분이 시시때때로 주시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만 내안에 계시면 됩니다. 그 분이 주시는 은혜만 있다면 아무리 차가운 세상도 다 녹일 수 있습니다. 답답한 일을 만나도 주눅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에는 손 잡이가 하나 있습니다. 양손에 짐을 가득 든 사람은 은혜의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손에 있는 것을 내려 놓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손이 비어있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강화도의 초대교인들은 그들의 손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오직 주님의 손만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은혜가 쏟아져 들어온 것입니다. 험한 세상에서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은혜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